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부산(釜山)의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9월 ‘성질불량(性質不良)·사상불온(思想不穩)’을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갔다. 1930년 8월 1일 대송청년회관(大松靑年會館)에서 개최된 울산청년동맹 대송지부(大松支部) 설립준비위원회에서, 18일 개최된 울산청년동맹 서생지부(西生支部) 설치대회에서 각각 임시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 서생면에서 해산물 가게를 경영하면서 청년운동뿐만 농민운동과 어민운동(漁民運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서생농민조합(西生農民組合)에서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1년 6월 5일 서생농민조합 간부 송두현(宋斗玄)·김두찬(金斗贊)·박선지(朴善芝)·김학도(金鶴道)·지몽지(池蒙芝) 등과 함께 울산경찰서(蔚山警察署) 고등계(高等係)에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13일 서생농민조합회관(西生農民組合會館)에서 김두찬 등과 함께 서생어민조합(西生漁民組合) 창립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준비위원들이 ‘요주의(要注意)’ 인물이고 강령(綱領)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금지 및 해산 명령을 받았다. 이 일로 26일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1933년 12월부터 서생면에서 이규문(李圭文)·원옥선(元玉仙) 부부와 함께 농민복습회(農民復習會)라는 야학을 개설하여 무산아동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그러던 중 1934년 1월 신암(新岩) 바닷가에서 열린 야학 야구대회에서 소련의 국기(國旗)가 등장한 것을 단서로 또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으나, 4월 11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1935년 2월 6일 ‘울산적색농민조합(蔚山赤色農民組合) 사건’, ‘울산적색독서회(蔚山赤色讀書會) 사건’으로 박상선(朴相善)·이동개(李同介)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경찰서(慶州警察署)로 압송되었다. 9월 27일 예심에 회부되었고, 이듬해인 1936년 6월 26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상황과 출옥 시기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이후 여경수(呂敬守)·이광우(李光雨) 등 부산·울산지역의 동지 7~8명과 함께 1942년 5월경 ‘엠엘친우회(M.L親友會)’라는 소규모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군수품(軍需品) 제조공장 및 군사시설 파괴와 삐라 살포 등 반일투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3월경 또 다시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고문경찰로 악명 높았던 하판락(河判洛)의 가혹한 고문·취조를 받고,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1944년 7월 17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학적급명세부(學籍及明細簿)(동래고등학교)
- 동아일보(東亞日報)(1931. 6. 9, 6. 15, 1932. 9. 28, 9. 30, 1935. 2. 10, 9. 29, 1936. 6. 28)
- 조선신문(朝鮮新聞)(1934. 3. 20)
- 중외일보(中外日報)(1930. 8. 9, 8. 22)
-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고원섭 편, 1949) 10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14집, 261면
-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이기하, 1992) 14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