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930년 1월 부여지구에서 강 일(姜日) 등과 함께 격문을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데 참가하여 연락업무를 맡았다한다. 그후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문맹퇴치운동에 가담하여 1933년 4월 장정학당의 한글교사로 활동하면서 금강공산협의회(錦江共産協議會) 조직의 일환으로 부여농민구락부(扶餘農民俱樂部)를 만들었다. 그는 강일구(姜日求)·최재봉(崔在鳳)·장창선(張昌善)·전영철(田泳喆)·조병철(曺秉喆)·허원범(許元範)·노명우(盧命愚)·강도형(姜道馨) 등 동지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항일지하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12월 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근 2년간 옥고를 겪어야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형사사건부
- 판결확정증명
- 동아일보(1933.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