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부여지역에서 강일(姜日) 등과 함께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고 한다.
그후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문맹퇴치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금강공산협의회(錦江共産協議會) 조직의 일환으로 부여농민구락부(扶餘農民俱樂部)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강일구(姜日求)·최재봉(崔在鳳)·장창선(張昌善)·전영철(田泳喆)·강병국(姜秉國)·조병철(曺秉喆)·허원룡(許元龍)·노명우(盧命愚)·강도형(姜道馨) 등 동지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지하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12월 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의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근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후 형 강병덕(姜秉德)을 따라 만주 간도의 연길현(延吉縣)으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형사사건부
- 판결확정증명
- 동아일보(1933. 9. 29,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