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안동(安東) 지방 사람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도사(都事) 김도화는 곽종석(郭鍾錫)·지평 김흥락(持平 金興洛)·권진연(權晋淵)·강육(姜錥) 등과 함께 거의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분쇄하자는 이른바 안동통문(安東通文)을 각지에 파송하였다. 이에 벽산 김도현(碧山 金道鉉)이 김도화를 찾아와 거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아울러 안동 의병의 총수인 권세연(權世淵)과 도정 유지호(都正 柳止鎬)도 함께 의논하였다. 1896년 1월 안동부를 점령하였던 안동 창의대장 권세연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의 의진들은 정월 그믐께 친위대의 병력에 의하여 안동부가 함락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항일의 전통적 사상으로 뭉치고 일어났던 이 지방 인사들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안동에서 흩어진 의진의 중심 인물들은 다시 각처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점차 전력을 회복하였다. 그 중에 안동 청량산(淸凉山)에서 새로 복수창의(復讎倡義)의 기치를 세운 김도현과 유시연(柳時淵) 등의 의병진을 위시하여 권세연 및 영천(永川) 등지의 의병들은 2월 중순경부터 다시 안동부에 집결하였다. 이 때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이므로 안동부에 주둔하였던 파견군을 철수시켰다. 따라서 의병진이 안동부를 무난하게 차지할 수 있었다. 입성한 후 김도화는 의병 대장에 추대되었고, 유난영(柳蘭榮)이 안동도총(安東都摠)으로 임명되었다. 그밖에 그 일대에서 신망이 두터운 원로들로써 의진이 구성되었다. 이즈음 김도화는 의병장 경암 서상열(敬庵 徐相烈)에게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보내었다.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 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왔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펴는 도중 굽힘 있고, 굽히는 중에도 펴는 것이. 태악(泰岳)도 홍모(鴻毛)도 다 같은 이 티끌이라오. 밝고 밝은 이 마음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천일(天日)을 돌리는 그 일인들 어찌될 수 없으리.
이 시에서 김도화의 생사를 초월한 구국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수령들 중에서 일본의 편에 섰다고 인정되는 예천(醴泉)군수 유인형(柳仁馨)·의성(義城)군수 이관영(李觀永)·영덕(盈德)군수 정재관(鄭在寬)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의진들이 군사적으로 연합하여 상주(尙州)에 있는 적의 병참(兵站)을 공격하였다. 3월 그믐에 함창 태봉(咸昌 胎峰)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 2월 16일) 연합 의진의 의병들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2일 적군 50여명이 안동부로 들어가 시가에 불을 질렀다. 이때 안동읍 천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이것은 의병 전투사상 가장 큰 피해였다. 태봉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안동 의진은 대장 김도화를 중심으로 하여 부장(副將) 유난영·도총 김하휴(都總 金夏休)·선봉장 유시연(柳時淵)·소모장 이충언(李忠彦) 등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많은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안동 의진이 활발해지자,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진보(眞宝)의 허훈(許薰)·의성(義城)의 김상종(金象鍾) 및 선성(宣城)의 이인화(李仁和)의 의진들이 서로 호응하여 연락을 취하니 형세가 다시 크게 떨쳤다. 이후 고령으로 계속 활동은 못하였으나 소(疏)와 격문(檄文) 등으로 구국일념의 뜻을 불살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234·235·236·237·238·2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96·9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