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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4626
성명
한자 金道和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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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895. 12월 을미사변(乙未事変)단발령(斷髮令)항거(抗擧)하며 안동(安東)유림(儒林)들과 같이 거의통문(擧義通文)발표(発表)하고, 1896년 안동(安東)의병장(義兵將)으로 안동관찰부(安東觀察府)습격(襲擊)하는 등 활동(活動)하여 휘하(麾下)장병(將兵)들의 사기(士氣)를 높이고 을미의병(乙未義兵)에 크게 영향(影響)을 끼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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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안동(安東) 지방 사람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도사(都事) 김도화는 곽종석(郭鍾錫)·지평 김흥락(持平 金興洛)·권진연(權晋淵)·강육(姜錥) 등과 함께 거의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분쇄하자는 이른바 안동통문(安東通文)을 각지에 파송하였다. 이에 벽산 김도현(碧山 金道鉉)이 김도화를 찾아와 거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아울러 안동 의병의 총수인 권세연(權世淵)과 도정 유지호(都正 柳止鎬)도 함께 의논하였다. 1896년 1월 안동부를 점령하였던 안동 창의대장 권세연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의 의진들은 정월 그믐께 친위대의 병력에 의하여 안동부가 함락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항일의 전통적 사상으로 뭉치고 일어났던 이 지방 인사들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안동에서 흩어진 의진의 중심 인물들은 다시 각처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점차 전력을 회복하였다. 그 중에 안동 청량산(淸凉山)에서 새로 복수창의(復讎倡義)의 기치를 세운 김도현과 유시연(柳時淵) 등의 의병진을 위시하여 권세연 및 영천(永川) 등지의 의병들은 2월 중순경부터 다시 안동부에 집결하였다. 이 때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이므로 안동부에 주둔하였던 파견군을 철수시켰다. 따라서 의병진이 안동부를 무난하게 차지할 수 있었다. 입성한 후 김도화는 의병 대장에 추대되었고, 유난영(柳蘭榮)이 안동도총(安東都摠)으로 임명되었다. 그밖에 그 일대에서 신망이 두터운 원로들로써 의진이 구성되었다. 이즈음 김도화는 의병장 경암 서상열(敬庵 徐相烈)에게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보내었다.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 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왔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펴는 도중 굽힘 있고, 굽히는 중에도 펴는 것이. 태악(泰岳)도 홍모(鴻毛)도 다 같은 이 티끌이라오. 밝고 밝은 이 마음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천일(天日)을 돌리는 그 일인들 어찌될 수 없으리.

이 시에서 김도화의 생사를 초월한 구국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수령들 중에서 일본의 편에 섰다고 인정되는 예천(醴泉)군수 유인형(柳仁馨)·의성(義城)군수 이관영(李觀永)·영덕(盈德)군수 정재관(鄭在寬)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의진들이 군사적으로 연합하여 상주(尙州)에 있는 적의 병참(兵站)을 공격하였다. 3월 그믐에 함창 태봉(咸昌 胎峰)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 2월 16일) 연합 의진의 의병들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2일 적군 50여명이 안동부로 들어가 시가에 불을 질렀다. 이때 안동읍 천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이것은 의병 전투사상 가장 큰 피해였다. 태봉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안동 의진은 대장 김도화를 중심으로 하여 부장(副將) 유난영·도총 김하휴(都總 金夏休)·선봉장 유시연(柳時淵)·소모장 이충언(李忠彦) 등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많은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안동 의진이 활발해지자,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진보(眞宝)의 허훈(許薰)·의성(義城)의 김상종(金象鍾) 및 선성(宣城)의 이인화(李仁和)의 의진들이 서로 호응하여 연락을 취하니 형세가 다시 크게 떨쳤다. 이후 고령으로 계속 활동은 못하였으나 소(疏)와 격문(檄文) 등으로 구국일념의 뜻을 불살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234·235·236·237·238·2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96·9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도화 자 : 달민(達民), 호 : 척암(拓庵) 경상북도 안동(安東) 전기의병
본문
1825년 9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일직면(一直面) 구마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다. 아버지는 김약수(金若洙), 어머니는 진양(晉陽) 정씨(鄭氏)이다. 처가는 고성 이씨로 그 자신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존고모부(尊姑母夫)이다. 안동 지역의 유림은 1895년 을미사변과 이어 일어난 단발령의 시행에 즉각적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동 지역에서 을미의병을 주도한 인물은 퇴계 이황을 종장으로 삼고 있는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중에서 다수 배출된 특징이 있다. 구한말 손꼽히는 대 문장가이자 실천적 도덕을 강행한 기개 높은 명유로 위정척사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대장으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유치명의 문인 중에 가장 적극적인 항일저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유학자의 본분인 의리 정신을 발휘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1893년 천거에 의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수받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반포되자 7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안동의병을 이끌었다. 안동통문(安東通文)의 발의자 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흥락(金興洛)·유지호(柳止鎬)·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논의를 주도한 결과 안동의병부대 결성을 결의하고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음)12월 6일에 류도성(柳道性)·김흥락 등과 함께 봉화 유곡의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은 연무당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의병의 기세에 눌려 1896년 (음)1월 7일에 안동을 빠져나가다가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에 체포되어 (음)1월 13일 문경의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김석중이 이강년 의병부대에 의해 처단된 뒤, 신임 안동관찰사로 임명된 이남규(李南珪)는 상주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안동부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붕괴시키기 위한 공동작전이 필요해짐에 따라 안동의병부대는 봉화의병, 서상렬(徐相烈) 의병과 연합하였다. 이 시기 의병장 권세연이 사퇴하자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대장에 추대된 후 유난영(柳蘭榮)을 도총에 임명하고,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으로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창의진정소’를 올리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 봉기의 동기가 을미사변과 단발령임을 밝히고 개화파들의 행적을 비판하였다. 개화당으로 대구관찰사 이중하의 측근으로 알려진 의성군수 이관영(李觀永)을 효수하였다.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예천·진보·영양 등지에 소모관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진용을 확대하였다. 이 무렵 진주의병부대에 안동의병부대의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상렬 부대를 맞이하면서 연합 의병부대를 추진하고 (음)2월 7일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풍산에 집결하여 풍기·순흥·영천·봉화·선성·호서의병부대와 함께 예천으로 향하였다. 음력 2월 13일에 산양 장터에서 안동권 6개 의병부대와 호좌의병부대로 이루어진 7개 의병부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연합 의병부대는 태봉을 공격하기 전에 예천군수 유인형(柳仁馨)을 참수하여 기세를 올렸다. 유인형은 개화파 관리로 서울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 경군을 접대한 죄로 처형되었다. 연합 의병부대와 일본군과의 전투는 15일 밤에 개시되었다. 의병은 태봉전투에서 일본군 약간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직접 참가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군 권문팔(權文八)이 안동의병부대를 이끌고 간 것은 확인된다. 태봉전투 패전 이후 3월 초에 봉정사로 의병부대를 옮기고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최세윤(崔世允)을 좌익장으로, 김도현(金道鉉)을 부장으로, 서상렬을 군사에, 이긍연(李肯淵)을 종사관에, 권옥연(權玉淵)을 부장에 임명하는 등 편제를 개편하고 이천의병(利川義兵)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4월 초에 일본군의 봉정사 습격으로 패산하였다. 이후 김흥락, 하회 류씨 문중, 그리고 지역 사림에게 서신을 보내 협조를 부탁하였다. 고종이 장석용·정의묵·김근시를 파견하여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해산하지 않겠다는 격문을 보내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1896년 7월 이후 안동의병부대를 어떻게 유지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안동의병부대의 일부가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했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후 의병을 해산한 뒤, 정국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상소문과 격문을 발송하였다. 1905년 2월 을사늑약이 맺어질 때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를 올려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청물합방소」를 올리고 「격고통감문」, 「재격고통감문」, 「포고각국공사관문」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라는 현판을 붙이고 사실상 가택연금 생활을 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열전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최익현·민영환전, 이재명전, 안중근·이준전, 김순흠전 등 4편으로 된 6명의 열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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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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