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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4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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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權世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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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895.8월 명성황후 시해(明成皇后弑害)격분(激憤)하여 안동(安東) 창의대장(倡義大將)추대(推戴)하자 각 지방(各地方)격문(檄文)을 보내어 상호긴밀(相互緊密)연락(連絡)인심(人心)고무(鼓舞)하고 의병(義兵)사기(士氣)가 높아져 이강년(李康秊), 유시연(柳時淵), 김도화 등(金道和等)의병장(義兵將)과 함께 영주(榮州), 안동(安東), 봉화(奉化), 청송(靑松) 등지(等地)에서 왜군(倭軍)전투(戰鬪) 많은 전과(戰果)를 올린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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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권세연은 경북 봉화(奉化) 출신으로 안동에서 살았으며,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다. 그의 고향 안동은 1차 의병운동 당시 경상도 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지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안동 일대의 유림들 간에 통문(通文)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안동통문(安東通文)은 안동군의 유학자 곽종석(郭鍾錫) 도사 김도화(都事 金道和) 지평 김흥락(持平 金興洛) 권진연(權晋淵) 강 육(姜 ) 등의 명의로 을미년 12월에 유포되었다. 그리고 예안통문(禮安通文)은 유생 이만응(李晩應) 금봉술(琴鳳述) 목사 이만윤(牧使 李晩允) 진사 김수현(進士 金壽鉉) 승지 이중봉(承旨 李中鳳)의 명의로 을미년 12월에 유포되었다. 이리하여 안동의 의병은 음력으로 12월 초3일 즉 건양 원년 1월 17일에 수백 명의 의병이 모여서 안동의 관찰사부(觀察使府)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으니,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달아났다. 지평(持平) 김흥락(金興洛)과 도정 유지호(都正 柳止浩)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 참모진에서는 권세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상오(李尙五)를 좌익장(左翼將)으로 임명하는 등 부서를 정하니 진용이 차츰 정비되었다. 이에 권세연은 다음과 같은 격문을 각처 의병과 각 지방으로 보내어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인심을 격려 고무하였다.

안동격문(安東檄文)

안동 창의 대장은 눈물을 씻고 격문을 띄웁니다. 천지가 위치를 정했으며, 중화와 오랑캐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고, 춘추(春秋)가 엄연히 있으며 난적(亂賊)의 죄는 도망 못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에 욕이 되는 망극한 변이 있으면, 백성은 분개하여 반드시 설욕(雪辱)할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저 호전(胡銓)이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돌리며 천리 밖에서도 낙담(落膽)을 했고, 안고경(顔 卿)이 적을 꾸짖어 의리로 항거하며 여러 나라가 휩쓸려 호응하였으니, 이는 모두 의분심이 가슴속에서 격동되어, 천하의 강상을 붙잡아 놓은 것입니다. 지금 왜놈을 물리치고 흉적을 토벌하는 일에 있어서도, 모두가 목숨을 버리고 의를 택하는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아! 저 왜놈들은 계급으로 말하면 2백년 동안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요, 원수로 말하면 4백년 동안 우리가 이를 갈던 적이니, 설사 성의와 호의로 우리에게 화친을 청한다 해도 오히려 그 놈들을 죽여 없애고만 싶고 똑바로 보기도 싫은데, 감히 방자하게 간사한 꾀를 부려 까닭 없이 트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명(亡命)한 역적과 결탁하고, 무뢰배들을 종용하며, 한 가지 기술의 장점을 과장하여 우리 용기를 좌절시키고 오영(五營)의 군사를 억압하여 우리 수족을 놀릴 수 없게 하여,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우리대신을 죽이고, 연호(年號)를 황제의 예로 쓰게 한 것은 중국과 이간을 붙이자는 수작이요, 재정을 내어 구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우롱하는 데 불과하며,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을 함부로 고치고, 선왕의 법복을 강제로 무너뜨리며, 악독한 손길이 대궐 안에 뻗치니 신자(臣子)로서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입니까. 머리 깎는 칼이 도마에 올랐으니 고금에 이런 변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작지 않은 나라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위태하게 될 줄을. 저 개 돼지 같은 외국놈의 침략은, 실로 극흉극악한 역적놈들의 내응이 있는 때문입니다. 전일 사흉(四凶)의 죄는 만 번 죽여도 도리어 경하고, 지금 십신(十臣)의 악은 온 나라가 함께 분히 여기는데, 오히려 감히 임금의 위령(威令)을 빙자하여 장차 민생을 다 머리 깎으려 드니, 참으로 원통하구려. 그 괴수를 없애지 못하면 지하(地下)에 가서 선왕을 뵈올 낯이 없고, 이 머리를 보전하지 못하면 무슨 마음으로 세상에 산단 말입니까. 세연(世淵) 등은 문명의 고장에 생장하여, 충효의 훈계를 복습하였던 바 있거니와,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 어찌 명(命)에만 맡기고 다스리지 않으리오. 운수가 비록 비색하지만 혹시 하늘을 힘입어 극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일신상 장래를 생각해 보면, 반드시 목전에 말못할 일이 있고야 말 것이니, 살아도 보람없이 산다면 어찌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만 같으리까. 비록 임금의 조서(詔書)는 받들지 못했지만, 스스로 격동하는 기분을 참지 못하여, 마침내 고을 사람을 규합해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칼과 창은 무신년의 구장(舊藏)을 꺼내고, 병대의 규모는 임진년의 전례를 모방하였습니다. 군사는 지치고 양식은 떨어져 저놈들은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와 같을 것이요, 지리와 인화를 얻어 우리는 부우(負 )를 의지한 범의 형세가 될 것이니, 굳이 서로 심력(心力)을 합한다면 씨 없이 다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우리 동지 여러분께서는 함께 좋은 꾀를 토의하지 않으시렵니까. 혹은 밭 갈다 쟁기를 던지고 손을 부비며, 혹은 칼로 책상을 치고 마음으로 맹서하며, 혹은 주의(周衣) 안에 갑옷을 입고, 혹은 수레로 군량을 수송하여,청해(靑海)에서 장사의 칼을 씻고, 고가(藁街)에다 간신의 머리를 매달지니 성공하면 큰 공훈이요, 죽어도 넋이 될 것입니다. 아! 인정은 대개 서로 마찬가지인데, 윤강(倫綱)이 어찌 영원히 땅에 떨어지오리까. 이 격문의 사연을 듣는다면, 반드시 통곡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을미 12월 일 경상도 안동 창의 대장 권세연은 격(檄)함

이 격문에서도,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개화 내각의 제대신(諸大臣)들에 대한 증오심이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이러한 적개심·증오감은 의병진에 앞장섰던 사람에게만 국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어디에서나 의병의 깃발이 날리는 곳에는 많은 민중들이 여기에 호응하고, 생명과 재산을 아끼지 않으면서 지원, 협력하였던 것으로서, 안동 지방의 의병 세력 역시 거의(擧義) 후 10여일 간에 그 수효가 4만 명에 이르렀다고 서울에 알려지게 까지 되었다. 1896년 1월 7일 격문을 사방에 유포하자 안동을 비롯한 예안(禮安)의 이만응(李晩應)·영양(英陽)의 조승기(趙承基)·문경(聞慶)의 이강년(李康·)·유시연(柳時淵)·김도화(金道和)·김도현(金道鉉) 등 각지의 의병장들이 상호 긴밀한 연결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안동 창의 대장 권세연의 명망이 일찍이 그 일대에서 높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의병의 봉기가 어느 곳에서나 대개 그러하였던 것처럼, 안동 의병 역시 쌓인 울분과 치미는 적개심에 의하여 일어났을 뿐, 훈련 없는 군사들이요, 또 대의명분만 내세우던 유림의 인사들이 영도하였던 만큼 치밀한 작전 계획 등이 짜여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1896년 1월 28일에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이 지방과 서울의 많은 관군과 함께 갑자기 쳐들어오니, 의병진에서는 항전을 시도하여 보았지만 훈련된 관군의 계획적인 공격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이리하여 형세가 기울어지자 대장 권세연은 최후까지 싸워서 한 몸을 바치려 하였으나, 참모들의 간곡한 권고에 의하여 몸을 피하였으며, 1월 29일에 읍내가 관군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입성한 관군과 김석중은 경내 유림 인사들의 집을 수색하고 방화하는 등 분풀이를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종의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젯밤에 관찰사 김석중이 많은 관병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새로 일으킨 의병들로서는 당적하기 어려워 모두 도망해 흩어지자, 관병들이 각처의 의병들을 일으킨 집들에 불을 질러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위의 글은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이 아직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의병대에 속하기 전에 안동 의진의 세력이 장대하다는 소식을 듣고 합세하러 가다가 동리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말이다. 그래서 이춘영은 다시 영춘(永春)을 거쳐 영월로 가서 의암을 뵙고 주장(主將)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안동 의진은 처음부터 무참히 패배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 일이 기폭제가 되어서 당시 유림에서 이름이 높았던 의암이 손수 의진의 총수가 되어 그를 따르던 많은 유림 인사들이 거사에 참여하였다. 이에 안동 의진에 속하였던 의사(義士)들도 정의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여기 저기서 모이고 연락하여 다시금 토역복수(討逆復·)를 위한 재거의 결의와 준비를 굳건히 하였다. 즉, 김도현(金道鉉)·유시연(柳時淵) 등은 안동 의진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준비를 계속 진행하여, 안동 봉기 후 1개월 만인 2월 17일 안동 청량산(淸凉山)에서 새로이 거의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이들은 안동 뿐 아니라 영주(榮州)·봉화(奉化)·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戰果)를 올리고 경상도 동북부 일대를 의병진이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은 권세연의 직접적인 공로로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영향력 하에 성장한 사람들의 활약상이므로 이들을 통하여 그의 간접적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권세연은 당시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안동 의거 이후 무력투쟁을 계속한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유림을 통하여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64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192·19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83·393·5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0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85·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1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1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세연 자는 조원(祖源), 호는 담와(澹窩) 혹은 성대(星臺) 경북 봉화 전기의병
본문
1836년경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면(奉化面) 유곡리(酉谷里)에서 아버지 권진하(權鎭夏)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후예이며,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의 주손(胄孫)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조원(祖源)이며, 호는 담와(澹窩) 혹은 성대(星臺)이다. 어려서부터 영매(英邁)하고 재국(才局)이 탁월하였다. 9세 때인 1844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가에서 자라며 외삼촌 김매수(金邁銖)와 김달수(金達銖)의 가르침과 자형(姊兄)인 안동 법흥(法興)의 이승목(李承穆)으로부터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1852년 족숙 기천(杞泉) 권승하(權承夏)와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55년에는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 신암(愼菴) 이만각(李晩慤), 복재(復齋) 강건(姜楗),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등과 함께 사사하였다. 1856년 11월 유치명의 문인 수백 명이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개최한 강회(講會)와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참가하여 강록유사(講錄有司)를 맡아 학문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864년에는 29세의 나이로 삼계서원(三溪書院)의 재석(齋席)이 되었으며, 1870년에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871년 6월 신미양요(辛未洋擾)에 대한 상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흥선대원군 정권의 사액서원 훼철령(毁撤令)에 반대하여 삼계서원에서 스승 권승하와 함께 영남 사림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였다. 1877년 스승 권연하와 함께 삼계서원의 복설(復設)을 위한 삼계사약(三溪社約)을 주도하여 월유사(月有司)를 맡았으며, 1877년에는 박주종(朴周鍾)을 소두(疏頭)로 서원 복설을 주장하는 영남 유생 1만여 명과 함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77년 여름 풍기(豐基)로 이사하였다. 1881년 영주(榮州)의 성곡(星谷)으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고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남계(楠溪) 안호연(安浩淵), 저초(渚樵) 황조하(黃肇夏), 영휴(永休) 박희수(朴禧壽), 그리고 이덕표(李德杓)·이학소(李學紹) 형제 등과 교유하였다. 1883년 유승조(柳崇祖)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와 충재 권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때 남정철(南廷哲)의 천거로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고 영주로 돌아왔다. 1893년 봉화 유곡으로 귀향하여 문중 자제들의 교육에 매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 이후 1895년 삼계서원에서 향음주례를 행하여 외세 침략에 따른 내수외양(內修外攘)의 근본을 강조하였다. 1895년 11월 27일 단발을 하라는 공문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호계서당(虎溪書堂)에서 통문을 돌리며 창의를 모색하였다. 그해 1월 19일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밤을 틈타 안동부에서 도망한 뒤, 1월 20일 안동향교에서 열린 향회에서 안동의병의 창의장(倡義將)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인근 백성들에게 의병의 동참을 촉구하는 「경상도안동창의대장권세연격(慶尙道安東倡義大將權世淵檄)」을 발송하였다. 1월 21일부터 안동의병의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창의대장 이하 부장 곽종석(郭鍾錫), 중군장 유완(柳碗), 선봉장 김옥서(金玉瑞), 우익장 권용현(權用賢), 좌익장 이운호(李運鎬), 좌부장 이선호(李宜鎬) 등을 주축으로 진용을 편성하였다. 1월 24일 예천(醴泉)에 집결한 관군 300여 명과 일본군 100여 명이 1월 25일 용궁(龍宮) 산양(山陽)과 안동 풍산(豐山)을 거쳐 안동으로 진격하여 안동부 탈환을 시도하였다. 1월 26일 관군과 일본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봉장 김옥서(金玉瑞)에게 포군 70여 명을 거느리고 예천으로 출병하여 대응토록 하였고, 중군장 유완(柳碗)에게도 40~50명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이어 27일에는 우익장 권용현(權用賢)에게 군정 60명, 28일에는 좌부장 이의호(李宜鎬)에게 100여 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대적토록 하였다. 그러나 1월 29일 안동의병은 안동과 예천의 접경지대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2월 2일 안동부를 접수한 관찰사 김석중에게 안동의병의 문부(文簿)와 전곡(錢穀)을 압수당하였으며, 주민들은 강제로 단발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안동부에서 물러나 태백산 구마동(九麻洞, 현, 봉화군 소천면(小川面) 고선리(古善里))으로 들어가 재기를 기도하였다.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한 뒤 안동부를 공략하였다. 2월 19일 안동을 빠져나가 서울로 향하던 김석중이 의병장 이강년에게 체포되어 2월 25일 문경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2월 25일 이상룡(李相龍)·유시연(柳時淵) 등과 함께 안동부로 무혈 입성하여 안동향교에 진을 쳤다. 향회를 열고 군자금을 확충하기 위해 각 문중과 향교, 그리고 서원별로 의연금(義捐金)을 배분하였다. 3월 7일 하회(河回)의 유난영(柳蘭榮)을 제군문도총(諸軍門都總)으로 영입하는 등 의병진을 좀 더 전투적인 체제로 개편하였다. 대장 이하 도총 유난영, 부장 김하림(金夏林), 중군 권재호(權載昊) 등이었다. 3월 8일 봉화의병, 3월 10일 호좌의병이 안동으로 들어오자 3월 11일 연무당(鍊武堂)에서 연합하는 의식을 취한 뒤 군사 훈련을 하였다. 3월 12일 의병장에서 사퇴하였다. 「의병재거후의장단자(義兵再擧後義將單子)」에서 “본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어서 지난해에 패배한 일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지금은 군무가 그 모양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공사 간에 있어서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산 구마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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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재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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