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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3701
성명
한자 金法麟
이명 金法允, 梵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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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2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3.18 당시 서울에서 한용운(韓龍雲)에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받아 부산(釜山)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1920년 다시 서울에 돌아와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위한 의용 승군(義勇僧軍)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려고 자금조달(資金調達)유력 승려(有力僧侶) 모집(募集), 선언서(宣言書), 의용승군헌제(義勇僧軍憲制) 작성(作成) 등에 참가(參加)하였다가 피체(被逮)되기도 했으며 그 후 프랑스에 유학하였다가 피압박민족 대회 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활동하다가 1928년에 돌아와 이듬해 조선어학회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사업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고 1930년에는 한용운(韓龍雲)의 영향아래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일본 동경(日本東京) 지부(支部)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르는 등 지속적으로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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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불교 승려로서 3·1운동때 서울에서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리하여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만세운동 후 일경의 경계망을 피하여 1919년 4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 때 그는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단본부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상해에 파견되었던 그는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내 파견원의 자격으로 1919년 5월경 다시 국내에 들어 왔다.

국내에서 그는 상해의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기 위하여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하여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로 넘어가 안동현(安東縣) 육도구(六道溝)에 동광상점(東光商店)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상해의 신상완(申尙琓)과 백성욱(白性郁), 국내의 김상헌(金尙憲)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초 의용승군(義勇僧軍)을 계획하고 국내에 들어왔으나 사전에 동지가 붙잡히는 바람에 다시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의용승군 계획은 사전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뜻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의용승군 계획이 좌절된 직후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승려로서 외국 유학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폭넓은 세계를 접하고 그 속에서 조국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유학에 나선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文學部)에 재학하면서 한편으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친 그는 1928년 초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렇듯 표면활동과 함께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것이 만당(卍黨)의 결사운동이다. 만당은 불교계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한용운의 지도 아래 김법린과 조은택·박창두 등 승려들이 1930년 5월에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였다. 이러한 만당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였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며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 동경(東京)에 까지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김법린은 동경지부의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만당의 조직이 1938년 말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다시 붙잡혔다. 이 때 일제에 붙잡힌 회원은 그를 비롯하여 32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불로 지지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형의 고문을 2년 넘게 당하다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9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87·189·338·883·88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7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77·262면
  • 동아일보(1928. 1. 16, 3. 23)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501·869·873∼875·880∼882·890·892·999·1011·101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7·17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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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법린 본명 : 김진린(金振隣), 호 : 범산(梵山) 경상북도 영천(永川) 만당사건, 조선어학회사건
본문
1899년 8월 23일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신녕면(新寧面) 치산리(稚山里)에서 부친 김정택(金玎宅)과 모친 김악이(金岳伊)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본명은 김진린(金振隣)이다. 법명(法名)은 법윤(法允)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가 바꾼 이름이 법린(法隣)이고, 호는 범산(梵山)이다. 유년시절 영천의 신녕보통학교에 다녔고, 15세가 되던 1913년 은해사(銀海寺)로 출가하였다. 양혼허(楊渾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1915년 범어사(梵魚寺)로 승적을 옮겼다. 범어사에서 신식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 중학과정)를 마치고 강원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범어사는 민족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1912년 5월,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당이 개설되면서 민족불교의 중앙본부 역할을 하자 범어사에서는 많은 지원을 하였다. 범어사에서 명정학교 졸업생 중 인재를 선발하여 서울로 유학을 보낼 때, 함께 선발되었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불교계 학교인 중앙학림에 편입하였다. 당시 중앙학림은 우수한 청년 승려들이 배우던 학교로 서울에서는 불교계의 유일한 신식학교이었다. 중앙학림의 청년 승려들은 불교와 신문명을 배우면서 민족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바로 그때, 3·1운동 민족대표인 한용운(韓龍雲)은 서울 계동 자신의 집에서 계몽지인 『유심』을 발간하며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한용운과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긴밀했는데, 이때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유심』에 글을 기고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밤 한용운은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의 학생들을 자신이 처소로 불렀다. 이때 한용운은 3·1운동 준비 및 독립선언서 인쇄 등을 전하면서 학생들에게 3·1운동 참여를 당부하였다.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포교당(인사동)으로 가서 만세 운동을 숙의하였다. 3월 1일 탑골공원의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3월 4일, 범어사로 내려가서 범어사 만세 운동을 추동하였다. 범어사 학인들과 협의하여 선언식 거행, 선언서 등사, 결사대 조직, 범어사 인근 동래에서의 만세 운동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申尙琓)·백성욱(白性郁)과 같이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만주 안둥현(安東縣)에 동광상점이라는 쌀가게를 내고, 그곳을 근거로 상하이와 국내 간의 비밀 활동을 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혁신공보』이다. 또한 임시정부 밀령으로 독립사료의 수집에도 나섰다.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집을 발간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하기로 하자 자료를 모아서 임시정부에 보냈다. 상하이의 승려들이 추진한 것은 임정의 경제적 지원과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대한승려연합회 조직이었다. 이런 구도에서 승려들이 제공한 군자금의 임정 전달, 승려의 임정 고문 추대 등이 있었다. 또한 중견 승려 12명의 이름으로 「불교승려선언서」가 상하이에서 발표되었고, 이때 대한승려연합회가 추진한 의용승군의 가동을 위해서 국내로 잠입하였다. 범어사·석왕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기밀부를 설치하였다. 이런 움직임이 1920년 4월 일본 경찰의 검거망에 걸려들어 체포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학업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학업 재개를 결정하고 1920년 4월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중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 보내는 유법장학회(留法獎學會)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이름을 김법윤에서 김법린으로 개명하고, 1921년 2월 프랑스로 떠났는데 40일 만에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청소부를 하면서 불어를 배웠고. 파리대학교 부설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인들을 규합하여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였다. 1926년 7월 파리대학교(소르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은행에 근무하며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7년 2월 10~14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21개국의 174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를 독립운동의 여론 조성 기회로 인식하고, 이극로(李克魯)·이미륵(李彌勒)·황우일(黃祐日)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단장은 이극로였다. 이극로와 황우일은 서울 한인작가언론인협회 소속, 이미륵은 재독한인학생회 소속, 김법린은 파리한인회 회장 자격으로 대회 본부에 등록하였다. 이들은 대회 개최 이전에 한국 식민통치 상황, 독립투쟁 의지 등을 정리한 8쪽 분량의 책자인 『한국의 문제DAS KOREANISCHE PROBLEM』를 제작하여, 각국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대회는 예비회(2.5~9)와 본회(2.10~14)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본회 첫날인 2월 10일 태극기가 게양된 회의장에서 한국 대표단을 대표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폭력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고, 2월 14일 최종회에서는 ‘아세아민족회’의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연설 내용은 베를린 노이어 도이처 출판사Neuer Deutscher Verlag가 대회 의사록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에그몽 궁전의 봉화』라는 제목으로 펴낸 단행본에 전한다. 이 책자에는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문 전문, 한국 참가자 명단과 직책, 한국 대표단 결의안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27년 12월 9~11일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 최린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와 학업을 지속하려고 하였으나, 국내 불교계의 간곡한 요청으로 결국 귀국을 결심하였다. 국내 불교계로부터 귀국 보조비를 지원받아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1928년 1월 14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여러 사찰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유일한 불교계 잡지인 『불교』를 발간하는 불교사에 입사하였다. 이 잡지의 학술부를 책임지면서 유럽의 불교학 동향을 전달하였다. 또한 1928년 조선불교청년회 재건, 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 등을 통해 국내 불교계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승려대회는 사찰령 부정 및 불교 통일운동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불교계의 자주적인 규율인 종헌(宗憲)을 제정하고, 종단 체제를 출범시켰다. 불교계는 이 종헌에 의거하여 식민지 불교체제를 부정하고 자주·자립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종헌체제는 식민지 불교 극복과 자주적 종단 건설이었으나 친일주지들의 비협조로 3년 후 해소되었다. 193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초기불교와 인도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국내의 불교 청년들은 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였다. 만당은 당원이 80여 명에 달하였다. 강령은 정교 분립, 교정 확립, 불교 대중화를 표방하면서 불교의 자주화, 식민불교에 저항, 민족불교를 지향하였다. 일제에 저항 노선을 갖고 비밀리에 결성된 만당은 불교 청년운동의 결사체였다. 일본에서 만당 결성의 소식을 듣고, 만당 일본지부 결성에 나섰다. 그리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지부장을 맡았다. 1932년 3월 귀국하여 모교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러면서 『불교』에 식민불교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중앙불전 강사를 역임하면서 교육을 통한 민족 자각에 나섰고, 불교혁신론에 입각하여 식민지불교 비판과 극복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교단과 만당에서 교단 운영 노선을 두고 갈등이 생겨 만당의 자진 해소, 『불교』 휴간 등의 일이 일어났다. 이때 중앙불전에서 물러나 만당 동지인 최범술이 주지로 있는 다솔사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후일을 대비하였다. 1935년 9월, 다솔사 강원과 해인사 강원이 합병되자 해인사 불교전문 강원의 원장을 맡았다. 1936년 1월 범어사 강원의 학감을 맡으면서 후배들을 지도하였다. 불교·영어·역사를 강의하면서 학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인사에 있을 때에는 팔만대장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불교문화 재건을 고민하였다. 그런데 1938년 무렵 만당이 일본 경찰에 노출되어 당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때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한편, 범어사 강원에서 강의하던 시절 조선어학회 활동에 관여하였다. 외국에서 유학하면서 모국어에 관심을 가졌고, 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 언어에 대한 많은 소양을 가진 학자였다. 조선어학회 사전 작업 시에 프랑스어와 불교 용어의 심의와 자문을 맡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10월 19일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최현배·이희승 등 12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고 1945년 1월 18일 출옥하였다. 이 일로 범어사 강원은 강제 폐교당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불교 종단의 총무원장을 맡아 식민불교 잔재를 청산하고 한용운과 함께 구상했던 대중불교 노선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산간 불교와 승려 중심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대중불교로 가자는 것이었다. 또한 사찰령 철폐, 사찰 재산 임시보호법 시행, 일본 불교 사찰 인수 등을 추진했지만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1948년 감찰위원회 위원, 1952년 고시위원회 위원장, 문교부 장관, 1953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제3대 국회의원(부산 동래), 1959년 원자력 위원장, 1963년 모교인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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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다솔사 경상남도 사천시
2 비석 3·1운동 유공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3 비석 3·1운동 유공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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