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6년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 순종 국장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참여했다.
5월 16일 박용규는 김재문(金載文), 황정환(黃廷煥), 이동환(李東煥) 등과 같이 문인근(文仁根) 하숙집에서 만세운동을 함께 할 동지 규합에 대해 협의했다. 5월 23일 성북동(城北洞) 삼산평(三山坪, 현재 삼선동)에서 학교별 족구시합을 개최해 약 50여 명의 학생을 모았다.
5월 28일 곽대형(郭戴炯), 김재문, 황정환, 이동환과 함께 서울 통동(通洞)의 김재문 하숙집에서 “조선민중이여! 우리들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여! 죽음을 결단하여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제목의 항일격문 원안을 기초했다. 이후 5월 31일까지 낙원동(樂園洞) 255번지에서 빌린 등사판을 사용해 약 5,000장을 인쇄했다. 6월 6일 약 1,000장씩 분배하고, 순종의 국장일 오전 8시 30분에 봉영(奉迎) 인파 속에서 격문을 배부하며 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했다.
6월 10일 순종의 국장 당일 오전 5시 30분경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조홍제(趙洪濟)에게 약 200장을 건넸다.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학생 이상민(李相珉)에게도 약 100장을 전달했다. 이들은 국장 봉영 인파 속에서 항일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외치려다 체포됐다.
박용규는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출판법(出版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공소를 제기해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9월 20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6. 11. 17)
- 6.10독립만세운동-제65주년 기념 자료집(6.10만세 기념사업회, 1991) 181~1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