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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339
성명
한자 金永學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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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년 연변교민회 간부(延邊僑民會幹部)가 되어 간민회(墾民會)조직(組織)하고 회장(會長)으로 취임(就任)되어 활동(活動)하였으며 간민회(墾民會), 광복단(光復團)간부(幹部)로서 1919. 3. 28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개최(開催)전간도(全間島) 독립선언 축하회(獨立宣言祝賀會)에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낭독(朗讀)하고 그(後) 독립군(獨立軍)무기 구입(武器購入)군자금(軍資金) 조성(造成)에 힘쓰면서 조선인(朝鮮人) 백만인 서명운동(百萬人署名運動)전개(展開)하는등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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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함북 명천(明川) 사람이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연변교민회(延邊僑民會)의 간부를 지내고, 1912년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여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으며 1914년 국민회(國民會) 조직에도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28일 국자가(局子街)에서 구춘선(具春先)·박동원(朴東轅) 등 33명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서 발표를 계획하고 동년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독립선언축하회(獨立宣言祝賀會)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간도지역 3·1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어 나자구(羅子溝) 삼도하자(三道河子)에서 구춘선·장한봉(張漢鳳)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고 동년 3월 28일 교민 1,000명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하여 항일연설을 하는 등 독립만세시위의 확산을 위해 힘썼다.

또한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조선국민의사회(朝鮮國民議事會)의 회장이 되어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간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4월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에 호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才亨)·이동휘(李東輝) 등과 대전자(大甸子)에서 무기확보 방안을 논의하고 무기구입을 위하여 노령(露領)에 파견되었으며, 동년 12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국제연맹회의에 제출할 조선독립 청원서의 작성을 위해 주영섭(朱永涉)·오창환(吳昌煥)·김철훈(金哲勳) 등과 함께 재해삼위국민회(在海蔘威國民會)를 중심으로 한국인 백만 명 서명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신민단(新民團)·군정서(軍政署)·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광복단(光復團)·의군단(義軍團)의 5개 단체가 국민회에 대하여 시정요구서를 제출하게 됨에 따라 그는 고득성(高得聖)·박현경(朴玄京)·홍춘하(洪春化)·박경철(朴京喆)과 함께 총기구입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1928년 연락차 서울에 들어왔다가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독립지사들과의 연락을 담당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776·789·812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7·14·33·42·105·164·170·424·42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96·69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학 - 함경북도 명천(明川) -
본문
1871년 7월 2일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서면(西面) 삼향동(三鄕洞)에서 태어났다. 1911년 중국의 북간도로 망명하여 옌지(延吉)에서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북간도 지역 한국인들은 경술국치 이전인 1910년 3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설립하였다. 간민교육회는 중국 지방 당국의 인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설립된 첫 북간도 한국인 조직이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1913년 4월 26일 간민교육회는 ‘민국행정의 일부기관’을 자처하는 간민회(墾民會)로 재편되었다. 이 때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간민회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옌지현·허룽현(和龍縣)·왕칭현(汪淸縣)을 아우르는 조직이었다. 간민회 조직원들은 중국의 지방 관원들과 친분을 유지하거나 회원 스스로 관원이 되어 지역민들의 복리를 도모하였다. 이때 지방정부의 관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일본 당국의 압력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방자치기관 혁파 방침에 따라 간민회는 1914년 3월 12일 해체되었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2월 18일 지린성 옌지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蛤蟆塘)에서는 조선독립운동의사부(朝鮮獨立運動議事部)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3월 13일 조선독립의사부와 조선독립운동기성회(朝鮮獨立運動期成會)로 개편되었는데, 이 기성회의 인물 중 대부분이 간민회 지도자 출신이었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 옌지현 국자가에서 조선국민의회(朝鮮國民議會)가 설립될 때 이 조직의 회장을 역임하였다.1919년 2월 18일과 20일 국자가 하장리(下場里)에서 독립운동가 32명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을 계획하였다. 또한 3월 13일 지린성 룽진촌(龍井村)의 서전(瑞甸) 평야에서 9,000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할 때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달 훈춘현(琿春縣) 나자구(羅子溝) 삼도하자(三道河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고, 3월 28일 한국인 약 1,000명을 모아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여 조국 독립에 대해 연설하였다.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독립운동기성회는 단체의 이름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변경하였다. 대한국민회에 북간도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합류하였고, 임시정부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당시 대한국민회의 지도자로도 활약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무기 구매를 위해 러시아에 파견되었다. 1919년 12월에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국제연맹 회의에 송부할 「조선독립청원서」 의 작성을 위해 재해삼위국민회(在海蔘威國民會)를 중심으로 ‘조선인’ 백만인 서명운동에도 나섰다.1926년에는 룽징촌에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동만청년총연맹(東滿靑年總聯盟)이 1월에, 10월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총국(滿洲總局)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이 설치되었다. 이들은 1928년 1월 만주총국 산하의 동만청년총동맹(東滿靑年總同盟)으로 재편되었는데, 2월 4일 동만청총회관 건축후원회가 조직될 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제2차 간도공산당 사건 때 약 70여 명의 한인들과 함께 경성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8년 12월 2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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