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新幹會) 서울지회와 본부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광주학생운동 진상규명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1922년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청영어학교(日淸英語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곧 퇴학하고 귀국하였다. 그후「시대일보」사를 경영하고, 계속하여 『조선지광』잡지를 간행하였다.
그는 1927년 6월 10일 신간회 서울지회 설립대회에 참석하여 간사로 피선되었다. 그후 그는 같은 해 12월 14일에 열린 제1회 간사회에서 선전부 총무간사직을 맡았으며, 1929년 7월 23일에는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등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본관헌의 민족차별적 처사를 규탄키 위하여 조선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1929년 11월 허헌(許憲)은 이동준(李東駿)에게 광주사건의 진상을 발표하여 검거된 학생들의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하는 뜻으로 표어를 게재한 격문 2만매를 인쇄하게 하였으나, 일경에 정보가 미리 새들어가 허헌이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이원혁 등은 그날 오후에 회합을 갖고, 결의문을 작성하여 서울시내에 있는 각 언론신문사에 보내고, 신간회 중앙 본부와 행동을 같이 하자는 통지문을 각 지회에 보내기로 하였다. 결의문은 김동준 등이「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등 각사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1929년 12월 13일 권동진(權東鎭)·허헌·홍명희(洪命熹) 등 10인 명의로 광주학생사건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31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騎驢隨筆(宋相燾) 413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6輯 378面
- 倭政時代人物史料 三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768·769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38·239·253·255·257∼260·1717∼172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294·301·314·315·319·325·326·839·841面
- 東亞日報(1927. 12. 18, 1929. 12. 13, 12. 28, 1930. 6. 10, 8. 26, 9. 10, 1931. 2. 14, 4. 17, 5. 18, 5. 19, 1932. 1. 23, 1. 24)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1931. 4. 24. 京城地方法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券 63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467·57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