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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184
성명
한자 柳東說
이명 柳東烈, 柳東悅, 柳靑松, 號:春效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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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89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8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6년 신민회(新民會)가입(加入)이래(以來) 임시정부(臨時政府)군부 요직(軍部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만주(滿洲)파견(派遣)되어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지휘(指揮)하다가 1931년 일제(日帝)만주(滿洲)석권(席捲)하자 다시 임시정부(臨時政府)합류(合流)하여 의정원 의원(議政院議員) 국무위원(國務委員) 등으로 활약(活躍)하였고 3당통합운동(黨統合運動)을 벌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지원(支援)하는 등 현저(顯著)한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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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대한제국군 육군 참령으로서 1906년 미국으로부터 귀국한 안창호(安昌浩)와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1907년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경술국치 이전에 일제의 침탈을 결사 반대하는 격문을 띄우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던 중 안창호 등이 주최하던 중국에서의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에 무력 항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 관헌에게 붙잡혔다.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가 되었으나 1년 6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3년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北間島) 길림(吉林)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에 길림(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선포하였을 때 안창호·김좌진(金佐鎭)·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39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13도 대표가 모여 조직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참모부총장, 노령 대한국민회의정부(大韓國民會議政府)의 참모총장에 각각 선임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사직을 맡아서 광복군(光復軍)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9년 7월 동삼성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길림으로 파견되었으며,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독판(軍政司督辦)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무장항일운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임명되어 1924년 4월까지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길림에서 각계의 혁신과 인사들이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으며 그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3월 민족혁명가들이 길림의 국민부 사무소에 모여 유일당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게 되자 그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임시정부에 귀환하여 다음해 10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였으며, 1932년 12월에는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부터 1935년, 1939년부터 1940년, 1943년 3월부터 1944년 4월 등 수차에 걸쳐 임시정부 국무위원(참모장) 등을 역임하였고, 특히 1935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김규식·지청천·신익희 등과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전선을 통합하고 구국운동에 전력하였다.

1938년 5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 3당 통합운동을 추진하여, 1940년 5월 기강(藄江)에서 조직한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에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여 홍진(洪震)과 함께 당을 이끌어 조국광복을 대비하였다. 광복후 귀국하여 건국활동에 전념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무장독립운동비사 789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40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57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518·757-758·762·766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1집 191·303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3집 534·536·537·64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2권 66·6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3권 81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4·25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4·112·1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33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8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6·232·23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14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3·56·139·192·75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2권 65·321·328·45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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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유동열 호 : 춘교(春郊), 이명 : 동열(東悅), 동열(東烈), 청송(靑松) 평북 박천 -
본문
1879년 3월 26일 평북 박천군 박천면(博川面) 남부동(南部洞)에서 유종식(柳宗植)과 모친 최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호는 춘교(春郊), 이명은 동열(東悅), 동열(東烈), 청송(靑松)이다. 어린 시절 집안에서 전통교육을 받았고, 19세 되던 1898년 종형 유동작(柳東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인 세이죠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군사교육을 받았다. 1901년 11월 1일 졸업 후 사관후보생으로서 도쿄 근위사단에 배속되었다. 1902년 12월 1일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5기생으로 기병과에 입학하여 1903년 11월 30일 졸업하고, 견습사관으로 일본군 근위사단 예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근위사단이 조선으로 이동하게 되자, 일본군 견습사관 신분으로 참전하였다.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기병 참위에 임관되었으며, 원수부 관전장교라는 직책까지 부여되어 자유로이 일본군을 시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전선의 확대로 만주 펑황성(鳳凰城)까지 갔다가, 1904년 8월 귀국하였다. 1904년 8월 12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배치되었다. 1905년 3월 육군 기병 부위(중위)로 진급하였고, 7개월 만인 10월에는 정위(대위)로 진급하였다. 그후 기병대 대장, 군무국 마정과장 등을 거쳤다.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등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는 현실을 보면서 대한제국 군인들은 비밀리에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이갑(李甲) 등과 효충회(效忠會)를 조직하여,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이 양위를 강요받게 되자, 이를 저지하려 하였고, 친일파 대신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이갑 등이 체포되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906년 기병대대장으로 재직하던 중 서우학회(西友學會)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서우학회에 30여 간의 가옥을 기증하여 서우학회 회원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학회 기관지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1907년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갑, 김구(金九)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9년 3월 1일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 본회에 참석하여 학생운동을 격려하면서 정세를 관망하던 중,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급전을 받고 귀국한 다음 국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국외 망명은 신민회의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09년 10월 초순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 이갑, 이강(李剛) 등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칭다오(靑島)를 근거지로 구국운동을 벌이기로 협의하였다. 1910년 4월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위한 청도회의에 참여하였다. 회의는 급진론과 온건론으로 갈렸는데, 그는 급진론 즉 무장투쟁론을 지지하였다. 이동휘(李東輝)가 주창한 무장투쟁론은 만주 미산현(密山縣)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일본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자금은 이종호(李鍾浩)가 출연키로 하고, 그는 이갑 등과 군사훈련을, 신채호가 교양교육을, 김지간이 토지경영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하지만 사관학교 설립 시도는 자금을 출자하기로 한 이종호가 거부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1910년 10월 경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1911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사건(일명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191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약 2년간 투옥되었다가 1913년 3월 무죄로 방면되었다.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여 성낙형(成樂馨), 박은식(朴殷植) 등과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신한혁명당은 제1차 세계대전기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독립을 위한 호기로 삼고자 하였다. 신한혁명당에서는 당수로 고종황제를 추대하려 하였다. 그는 신한혁명당의 교통부장에 임명된 후 1915년 초 성낙형과 함께 펑톈과 서간도 각지를 돌며 동지들을 모으는 등 조직 확대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성낙형이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됨으로써 고종황제를 추대하여 독립을 이루려던 노력은 좌절되었고,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이 좌절되자 연해주로 가서 대한제국 군대 선배인 이동휘와 연계하였다. 1918년 3월 러시아령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인 정치망명자회의가 개최되었고, 준비위원장인 이동휘를 비롯하여 러시아령과 중국령의 유력한 한인혁명가들이 참석하였다. 당시 10월혁명 이후 러시아의 볼세비키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1918년 6월 한인사회당의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에 선임되어, 무장부대 편성사업을 추진하였다. 우선 하바로프스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군과 한인청년들을 데려다 훈련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홍범도, 이범윤 등과 우스리스크 철도 주변의 교포들을 대상으로 3백여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전일과 함께 1백여 명을 인솔하고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군, 백위군과 싸웠다. 전투에서 30여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위군이 하바로프스크와 연해주지역을 장악하자, 그는 한인사회당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그는 북간도지역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였는데, 1919년 4월 한인사회당은 블라디보스토크 교외 산림에서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북간도 훈춘(琿春)에서 조직된 김규면의 신민단과 통합하였는데,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2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국내외 대표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에도 참여하였다. 3 ・ 1운동 직후 그는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 군사관계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았다. 1919년 3월 러시아령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4월 23일 국내에서 수립을 선포한 한성임시정부는 그를 참모총장에 선임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길림군정사 독판으로 활동하며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다. 1919년 9월 세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자, 그는 국무총리 이동휘를 따라 통합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년 반만에 사퇴하고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갔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대통령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사퇴하였고, 러시아의 정세도 볼세비키 세력이 장악하는 상황 등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유추된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하였는데, 총사령관은 소련 적군 제5군단의 카란다시빌리였고, 그는 최고려와 함께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고려군정의회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자유시에 있는 사할린의용대와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사할린의용대가 거부함으로써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사망하거나 체포되는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겨 독립군을 결집하려 하였다. 칭다오회의 때 미산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지린, 미산, 어무현(額穆縣)을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적을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을 벌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고려공산당을 배경으로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 하였던 것이다. 1922년 8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이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자, 군정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었지만 상하이로 가지 않고 서간도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 유일당운동이 시작되었다. 국내외 독립운동자들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만주에서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통합하자는 3부 통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3부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만주의 독립운동세력은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양대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1929년 4월 정의부 주도하에 참의부와 신민부의 일부 세력이 통합하여 국민부를 결성하면서 국민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부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일종의 행정부였고, 그해 12월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당군으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그는 최동오, 현익철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 후 조선혁명당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최동오와 함께 상하이로 갔다. 마침 상하이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여러 정당 및 단체들이 통일을 이루자는 취지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는데, 그는 통일동맹의 취지에 적극 찬동하는 한편, 중국측 인사들과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도 선임되었다. 통일동맹에는 한국독립당과 의열단을 비롯하여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의 5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각 단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1935년 7월 이들 단체는 해소를 선언하고, 새로운 통일전선기구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그는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등과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군사부장을 겸하였다. 그러나 통일전선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이념적 차이와 의열단의 당권 장악 등을 배경으로 두 달 여만인 1935년 9월 조소앙, 홍진 등이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그는 지청천 등과 당에 남아 김원봉 계열의 독주를 막고자 하였지만, 1937년 4월 지청천, 최동오, 김학규 등과 탈당하여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이들은 만주사변 이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다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7월 15일 국무회의에서 그는 지청천, 이복원, 현익철, 김학규, 안경근 등과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군사위원회에서는 우선 군대를 편성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골자는 속성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최단 기간 내에 초급장교 2백 명을 양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1개 연대의 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이었다. 1939년 치장(綦江)에서 임시정부는 정부의 한 부서로 참모부를 증설하였다. 군무부는 군사행정을 담당하고, 군사계획을 수립 추진할 기구로 참모부를 설치한 것이다. 참모부장에 선임됨으로써 그는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여 광복을 완성한다는 전제하에, 군사양성과 독립전쟁 수행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3년 안에 장교 1천 2백 명, 기본무장군 10만 명, 유격대원 35만 명을 확보하며, 인적 자원은 만주와 러시아령에서, 재정은 미주동포들을 대상으로 마련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러한 군사정책은 광복군 창설로 실현되었다.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군사특파단을 시안(西安)에 파견하여 일본군 점령지역인 화북지역의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또 중국정부를 상대로 한 협조와 지원 교섭 등의 준비작업을 거쳐 그해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한국광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통수부를 설치하여 운용하였다. 광복군을 지휘하는 통수부는 임시정부 주석(김구)과 참모총장(유동열), 군무부장(조성환), 내무부장(조완구)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참모총장이자 통수부의 막료로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제1진으로 환국하여, 1946년 6월 미군정 통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무부와 경비대간의 임무 범위를 구분짓고 군인 10만 명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항공대 창설 계획을 추진하는 등 정부 수립에 대비한 국군창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6년 9월 신진당 위원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통위부장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그는 분열된 민족진영의 강화를 표방한 민족진영강화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여 상무위원으로 민족진영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6 ・ 25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가던 중, 1950년 10월 18일 평북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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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모살미수 징역 10년 경성지방법원 1912-09-2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모살미수 무죄(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3-03-2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모살미수 무죄(원판결 취소) 고등법원 1913-10-0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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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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