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1924년부터 김제노동조합 등을 조직하여 노동운동을 하였으며, 통의부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세 차례의 징역과 한 차례의 구류 등 옥고를 치렀다.
오오득은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및 중동학교를 중도 퇴학하고, 신문기자 등을 하며 사회과학 도서를 탐독하였다. 1924년 3월 9일 김제읍내와 부근의 운송 인부 등을 규합하여김제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사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15일 김제노동조합은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절의 행사를 논의하면서 주간에는 시위행렬을 하고, 야간에는 강연을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여기에서 ‘노동자의 기세를 봐라’라는 주제로 연설하기도 하였다.
1927년 음력 5월 김제에서 조인현(趙仁賢)의 권유로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여 조인현에게서 실탄 3발을 받았고, 1928년 음력 2월경 조순식(趙純植)으로부터 권총 1정, 실탄 14발을 받아 보관하였다. 1928년 5월 이리경찰서는 이를 ‘전북폭탄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그들이 관공서·은행·회사 등을 파괴하여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추진하려고 한다며 오오득을 체포하였다.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총포화약류취체령 및 동령 시행규칙위반, 공갈죄 등으로 징역 8월(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받아 3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6월 15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오오득에 대한 감시는 여전하여 1930년 9월 9일 불시에 김제역 합동노동조합에서 김제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구류 15일을 받고 9월 24일 석방되었다.
1931년 8월 16일 오오득은 김제노동조합의 조합장이 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고, 투옥되는 간부가 늘어났으며 조합은 내부의 통제를 잃고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는 세력을 만회하고자, 1931년 9월 20일경, 정읍군에서 김혁진, 그리고 농민운동의 선구자인 김용원(金容轅)·유봉상(劉鳳相)·강연수(姜連洙) 등과 함께 회합을 가졌다. 지금의 김제노동조합을 본거지로 삼아 노동운동에 매진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정읍군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김용원은 이평(梨坪)농민조합을 완성하고, 유봉상은 감곡면에서, 강연수는 부량면에서, 그는 하리면·쌍감면에서 각자 농민을 규합해 단체를 조직하고, 기존의 합법농민단체인 화호농민동맹회(禾湖農民同盟會)에 가입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동 동맹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김제농민조합·정읍농민조합 등의 군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오오득은 1931년 10월 18일 김제역 앞에서 인부들과 함께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선전 격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오오득은 1932년 12월 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 250일 통산)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33년 3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 150日 통산)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4년 6월 3일 출옥하였다. 해방 후에도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대회에 김제군 대표로 참석하는 등 농민운동가로서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全州地方法院:1930. 3. 12)
- 東亞日報(1927. 4. 18, 1928. 6. 15, 9. 15, 1929. 12. 12, 1930. 3. 13, 9. 11, 10. 27, 1931. 11. 28, 1932. 10. 21, 11. 15, 12. 5)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33. 3. 14)
- 判決文(全州地方法院:1932. 12. 2)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倭政時代人物史料(국회도서관, 1983) 四 121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