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살(射殺) : 활이나 총 따위로 쏘아 죽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박이환은 전북 익산(益山)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의진과 이규홍(李圭弘) 의진에서 의병활동한 후기 의병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에 전념한 인물이다.
1906년 4월 25일 전북 정읍군 태인면 종성리(井邑郡 泰仁面 宗聖里)에서 면암이 거의하자, 박이환은 이규홍, 문형모(文亨謨)와 함께 참가하였다. 이때 박이환은 옥구(沃溝)·임피(臨陂)·함열(咸悅)·용안(龍安)·익산(益山) 등지를 다니면서 황제의 뜻을 전하여 의병운동에 참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면암의 체포로 면암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10월까지 의병을 모집하여 형 박영환(朴永桓)이 제공한 군자금으로 총기 3백여 점과 탄환 20여 두, 군도(軍刀) 50여 점, 그리고 화약 10여 두를 준비하여 의병운동에 대비하였다.
1907년 11월 6일 함께 거의한 이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副將)이 되어 250여 명의 의진을 구성하였다. 11월 25일 전북 고산면 가금리(高山面 柯琴里)에서 적과 교전하여 2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월 3일 진산(珍山)·금산(錦山)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2월 초순부터 전개된 일군의 의병 '대토벌작전'이 본격화됨에 따라 점차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4월 21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1914년 3월 면암 의진의 정신적 지주였던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이 고종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를 창립하였음을 전해 듣고 그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때 박이환은 익산 임피(臨陂) 대표로 활약하였는데 적에게 행적이 드러나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자 지하로 들어가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돈헌유고 6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2면
- 전북신문 1982. 9. 20∼9. 22 (이강오의 의병대장 오하 이규홍의 항일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