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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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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朴一秉
이명 朴春濤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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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7 훈격 애국장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조선인 고학생(苦學生)과 노동자를 돕기 위한 동우회(同友會)에 참여하였으며, 동년(同年) 6월 서울에서 조선청년연합기성회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21년 9월 대종교청년회 대표로서 워싱턴 태평양회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1922년 1월 서울에서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고, 1924년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 동년(同年)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 1925년 7월 4단체합동위원회 합동상무위원, 1926년 4월 정우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同年) 6월경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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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함경북도 온성(穩城) 출신인 박일병은 1913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한 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과에 입학해 일본역사와 철학을 연구했다. 이 무렵 그는 간도 등지를 왕래하였는데, 이미 일제는 그를 요시찰인물로 분류하여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3.1운동당시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후, 동경(東京)으로 돌아가 한국인 고학생과 노동자를 돕기 위한 동우회(同友會) 결성을 주도하고 회장이 되었다. 또한 유일(留日)조선인구락부 결성에도 참여했다. 1921년 귀국한 박일병은 동아일보 논설부장으로 있으며, 대종교 청년회 회장, 조선교육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해 6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대종교청년회 및 조선교육회 대표로서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박일병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종 단체 결성에 관여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서울에서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 7월 신사상연구회 설립에 참가하고 9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을 발기했다. 1924년 2월에는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 1925년 7월 4단체합동위원회 합동상무위원, 1926년 4월 정우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6월경 소위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일병은 2년만인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訊問調書(京城地方法院:1927. 10. 29)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東亞日報(1920. 6. 6, 1928. 7. 25, 1929. 5. 20)
  • 매일신보(1921. 4. 24)
  • 時代日報(1925. 7. 9)
  • 獨立運動史資料集(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제9집 668면
  • 獨立運動史資料集(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제14집 119·464면
  • 倭政時代 人物史料(국회도서관, 1983) 63면
  • 興南7·5 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일제하 사회·사상운동자료)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일병 朴春濤 함북 온성(穩城) 무산자동맹회, 신사상연구회, 신흥청년동맹, 조선공산당
본문
1893년 3월 3일 함경북도 온성(穩城)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춘도(朴春濤)를 사용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 당시 발생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의 조사 도중 고문으로 사망한 박순병(朴舜秉)의 형이다.1910년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였고, 1913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한 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과에 입학해 일본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였다. 이 무렵 간도 등지를 왕래하였는데, 이미 일제는 그를 요시찰인물로 분류하여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1919년 3월,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후, 도쿄(東京)로 돌아가 1920년 1월 조선인고학생동우회 결성을 주도하고 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1월 25일 조선인 유학생 김창수(金昌洙)·홍승로(洪承魯)와 유일조선인구락부(留日朝鮮人俱樂部)를 결성하였다.1920년 4월 1일자로 창간된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가 되었다. 4월 29일 경성시내 종교(宗橋) 예배당에서 열린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 주최 강연회에서 이상재(李商在)와 공업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이후 대종교청년회 회장, 고학생갈돕회 고문, 조선교육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6월 28일 장덕수·오상근·김명식 등과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이 되었다.1921~23년 대종교, 고려청년회, 고학생갈돕회, 무산자동맹회 등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교육문제와 대종교 등과 관련한 연설을 하면서 ‘청년웅변가’로 불리기도 하였다.1922년 1월 19일 무산자동지회 발기에 참여하고 같은 해 3월 무산자동맹회 간부를 지냈다. 조선교육협회 순회강연단 연사로, 함안(咸安)·동래(東萊)·대구(大丘)에서 강연을 하였다.1923년 7월 7일 서울 시내 낙원동에서 열린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9월 12일 북풍회 측과 제휴하여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준비회를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집회 금지로 실패하였다.1924년 2월 11일 김찬(金燦) 등 23명과 신흥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총회에 신흥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21일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중앙검사위원 선출을 위한 10명의 전형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신사상연구회의 명칭을 바꾼 화요회 결성에 참가하였다.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3월 15일 전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 서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4단체합동위원회의 화요회 측 합동상임위원으로 김찬 등과 선정되었고, 8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1926년 강달영 책임비서 당시 조선공산당 경성부 제8야체이카 책임자, 사상부 프락치야에서 활동하였다. 그 해 4월 정우회(正友會)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같은 해 7월 23일 6·10만세운동과 관련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1927년 9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체포된 100여 명과 함께 첫 번째 공판을 받았다. 10월 14일 조선공산당 사건 변호인단 일행인 일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와 김병로(金炳魯)·허헌(許憲)이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을 면회하였다. 10월 15일 명월관에서 열린 변호인단의 ‘공산당피고가족위안회’에서 부친은 “무산계급을 위한 운동에 수금(囚禁)된 것을 광영으로 알겠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1928년 2월 13일 경성지법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150일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7월 23일 항소를 취하하여 옥고를 치렀다.1929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정신 이상이 생겼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5월 18일 만기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수감 중 시력을 거의 상실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후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원하였다.1931년 6월 경성제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위독하여 고향인 함북 온성에서 정양하다가 1937년 2월 17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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