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함경북도 온성(穩城) 출신인 박일병은 1913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한 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과에 입학해 일본역사와 철학을 연구했다. 이 무렵 그는 간도 등지를 왕래하였는데, 이미 일제는 그를 요시찰인물로 분류하여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3.1운동당시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후, 동경(東京)으로 돌아가 한국인 고학생과 노동자를 돕기 위한 동우회(同友會) 결성을 주도하고 회장이 되었다. 또한 유일(留日)조선인구락부 결성에도 참여했다. 1921년 귀국한 박일병은 동아일보 논설부장으로 있으며, 대종교 청년회 회장, 조선교육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해 6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대종교청년회 및 조선교육회 대표로서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박일병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종 단체 결성에 관여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서울에서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 7월 신사상연구회 설립에 참가하고 9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을 발기했다. 1924년 2월에는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 1925년 7월 4단체합동위원회 합동상무위원, 1926년 4월 정우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6월경 소위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일병은 2년만인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訊問調書(京城地方法院:1927. 10. 29)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東亞日報(1920. 6. 6, 1928. 7. 25, 1929. 5. 20)
- 매일신보(1921. 4. 24)
- 時代日報(1925. 7. 9)
- 獨立運動史資料集(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제9집 668면
- 獨立運動史資料集(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제14집 119·464면
- 倭政時代 人物史料(국회도서관, 1983) 63면
- 興南7·5 第1事件 : 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일제하 사회·사상운동자료)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