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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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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朴來源
이명 朴來元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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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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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24. 10월 청년운동(靑年運動) 단체(團體)용진당(勇進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1925년 1월 경성인쇄공조합(京城印刷工組合)집행위원(執行委員)으로 동맹파업(同盟罷業)기도하였고 동년(同年) 5월 서울 인쇄직공청년동맹(印刷職工靑年同盟), 동년(同年) 8월 경성노동연맹(京城勞動聯盟)을 조직하였으며 동년(同年) 11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집행위원(執行委員)에 선임되었고 사상단체인 화요회(火曜會)·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에 관여하는 한편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소속되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격문(檄文)을 인쇄하며 천도교 구파 천도교청년동맹원(天道敎靑年同盟員)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등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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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企圖) : 어떤 일을 이루려고 꾀함. 또는 그런 계획이나 행동.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7년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공부한 뒤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 인쇄직공 견습생이 된 이래 사상운동에 심취하여 노동단체와 청년단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24년 10월 청년운동단체인 용진당(勇進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天道敎)의 양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5년 3월 권오설(權五卨)의 지시에 의해 경성노동연맹(京城勞動聯盟)을 조직하였으며, 인쇄직공조합연맹(印刷職工組合聯盟)·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京城印刷職工靑年同盟)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도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돈화청년회(敦化靑年會)·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 동인·화요회(火曜會)·정우회(正友會)·불꽃사(火焰社) 동인·연우사(鉛友社) 동인·혁청 단원·조선기근구제회(朝鮮饑饉救濟會)·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등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경성야체이카의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천도교 계통의 민족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화될 때 1926년 4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의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기에 앞서 추진한 메이데이 기념시위에도 깊이 관계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기념시위를 전개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로서 기념시위의 제반 준비를 담당했다.

그런 가운데 융희황제가 승하하면서 기념시위 계획이 6·10만세운동으로 전환되자, 그는 권오설로부터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 임무를 부여받고, 이같은 사실을 권동진(權東鎭)과 천도교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李鍾麟)·박내홍(朴來弘) 등에게 알려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는 격문 인쇄를 위해 손재기(孫在基)·백명천(白明天)·양재식(梁在植) 등 천도교 인물과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등 인쇄직공조합원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격고문(檄告文)’, ‘대한독립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격문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사일이 임박하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가 어려워지자 권동진에게 1만원의 자금을 요청하여 쾌락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천도교 구파청년단 상무위원, 천도교 중앙교회감사위원 겸 청년동맹대표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사상범검거실화집(池中世譯編, 1946) 27∼29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8권 190·198면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956) 236∼237면
  • 東亞日報(1926. 7. 2∼4·7. 13∼14)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289∼291·305면
  • 騎驢隨筆(宋相燾, 1955) 357∼358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7) 제5권 332∼335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권 48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권 1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5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703∼7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347·35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내원 박내원(朴來元), 아호 : 우춘(又春), 도호 : 범암(梵菴) 경기 이천(利川) 6.10만세운동,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본문
1902년 3월 5일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長湖院)에서 박광호(朴光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숭인동(崇仁洞)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이명은 호적명인 박내원(朴來元)이다. 아호는 우춘(又春), 도호(道號)는 범암(梵菴)이다. 아버지 박광호는 1893년 2월 동학(東學) 교도들이 광화문에서 교조신원운동을 벌일 때 소두(疏頭)로 활약했던 동학 지도자였다. 천도교 4대 교주인 박인호(朴寅浩)가 재종숙(再從叔)이고, 박인호의 양자인 박내홍(朴來弘)은 8촌 형으로 후원자 역할을 해주었다. 박인호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1917년 보성보통학교(普成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다시 YMCA 영어강습소를 2년간 다녔다.1921년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 인쇄공 견습생으로 취직한 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인쇄직공조합연맹(印刷職工組合聯盟)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3년 10월 용진당(勇進黨)이라는 청년운동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24년 4월에 167개 단체 204명의 대표가 모여 개최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총회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25년 1월 경성인쇄공조합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후 2월 동맹파업을 주도하였다. 대동인쇄주식회사에서 일어난 파업에서는 8시간 노동제 실시, 상여금 지불, 승급 실시 등을 요구하였다. 3월에는 인쇄 노동자에게 지식을 보급한다는 목적으로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으로 나섰다. 5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7월 대동인쇄주식회사를 그만두고 8월에 경성노동연맹을 결성하였다.그 사이 1925년 4월 20일 화요파(火曜派)의 일원인 김동명(金東明)의 소개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였다. 10월 1일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당원이 되었다. 노동자 출신으로 서울 지역 9개 야체이카(세포조직) 중 제2구 산하 조선노농총동맹 내에 설치된 제5야체이카 책임을 맡았다. 제1차 조선공산당이 11월에 탄로나자 화요회(火曜會) 회원이던 강달영(姜達永)과 권오설(權五卨)이 서울에서 극비리에 조선공산당을 재조직, 각각 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이때 강달영, 권오설과 함께 제2차 조선공산당 당원과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서울 야체이카의 언론 기관 당원 조직에서 활동하였다.1926년에는 조선공산당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천도교 구파의 청년지도자로서 4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규약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나아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만세시위에 앞서 조선공산당은 1926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해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국내 사회단체와 연대하여 대대적인 시위 투쟁을 벌일 계획을 마련하였다. 이때 조선노농총동맹 간부로서 기념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 계획은 4월 25일 순종(純宗)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모든 집회가 일체 금지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대신 이 기회를 빌어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1926년 5월 10일 이수원(李壽元)의 집에서 권오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데 합의하였다. 권오설은 운동 자금 마련과 격고문, 전단 등의 문구 작성을 담당하였다. 천도교측은 교인 동원과 지방 연락, 격고문 10만 장의 인쇄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그날 천도교 지도자인 권동진(權東鎭)을 찾아가 거사 계획을 알렸다. 권동진은 즉시 적극적인 협력과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어 천도교 구파 소속 천도교청년동맹 위원장인 박내홍과 집행위원인 손재기(孫在基)에게 이와 같은 계획을 알리고 6월 10일 순종 장례 당일에 전국 각 도 천도교인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경성인쇄직공조합 집행위원인 민창식(閔昌植), 양재식(梁在植)과 신흥청년동맹원인 이용재(李用宰) 등의 인쇄공을 설득하여 곧바로 인쇄 준비에 들어갔다.제일 먼저 민창식과 함께 안국동(安國洞) 36번지의 빈 집을 얻어 백명천(白明天) 부부가 들어가 살도록 하고 양재식은 하숙인으로 위장하였다. 5월 15일경 권오설로부터 원고를 넘겨받은 뒤 5월 19일에는 인쇄기 2대를 구입하여 양재식과 함께 인쇄할 종이와 잉크를 구입한 뒤 본격적인 인쇄에 들어갔다. 격고문 1만 2천매, ‘대한독립만세’ 전단 2만매,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하자’와 ‘조선의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하자’라는 전단 각각 6천매, ‘대한독립운동자는 단결하라’는 전단 8천매를 인쇄하였다. 5월 31일에 인쇄를 마치고 인쇄물을 천도교당 안에 있는 손재기의 집으로 옮겼다.6월 1일 권오설을 찾아가 인쇄의 완료를 알리고 지방 배포에 소요되는 경비를 요청하였으나 권오설은 자금 마련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하였다. 다시 권동진을 찾아갔지만 경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인쇄물의 지방 배포 계획은 취소되 었다. 결국 서울에만 살포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순종 인산(因山)일을 앞두고 예민해진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6월 6일 오전 천도교당 안에 자리한 개벽사(開闢社)을 기습하여 수색을 벌였다. 이때만 해도 숨겨 놓은 인쇄물은 안전하였다. 오후 들어 경찰들이 격고문이 있다는 첩보를 듣고 다시 천도교당 내외를 포위하고 샅샅이 뒤졌다. 결국 손재기 집에 은닉해 놓았던 인쇄물이 탄로 나고 말았다. 개벽사 제본공으로 일하던 고우섭(高宇燮)이 손재기 집에서 숨겨둔 상자에서 격고문 2매를 빼내 남편인 이상우(李祥宇)에게 넘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때 천도교당에서 붙잡혔다.일제 경찰은 약 80여 명을 붙잡아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9명을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때 조선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최종 재판은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주로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천도교청년동맹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천도교 활동에 주력하면서 교단을 이끌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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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재 경기도 포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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