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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權大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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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애족장
1919. 3월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 옥종면(玉宗面) 안계리(安溪里)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고 하며 1925년 4월 일본(日本)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월회(一月會),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재동경조선청년동맹(在東京朝鮮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6년 11월 재동경신흥과학연구회(在東京新興科學硏究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27년 7월 재일본(在日本) 동경조선노동조합(東京朝鮮勞動組合) 발회식에서 회계검사로 선출되었으며, 동년(同年) 4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일본부(日本部)에 입당한 후 1928년 4월경(月頃)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일본총국(日本總局) 동경(東京) 남부(南部)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활동하다 동년(同年) 6월 귀국하였으며, 1930년 6월 경남지역에서 조공 재건운동(朝共再建運動), 1931년 2월 경기도(京畿道) 김포(金浦)에서 조공재건설동맹(朝共再建設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국 책임자로 선출되었으며, 동년(同年) 7월 대구(大邱)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를 조직한 후 책임비서가 되어 서인식(徐寅植)과 함께 「코뮤니스트」, 「봉화(烽火)」 등을 발행하고 동년(同年) 9월 경남(慶南) 양산(梁山)에서 조직된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慶南赤色農民組合東部委員會)동년(同年) 12월 전남(全南) 광주(光州)에서 결성된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지도하다 1932년 3월 체포되어 1933년 4월 징역 6년을 받은 사실은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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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하동군(河東郡) 옥종면(玉宗面) 안계리(安溪里)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서울로 올라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24년 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도쿄[東京]에서 사상단체인 일월회(一月會)·재동경조선청년동맹(在東京朝鮮靑年同盟)·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등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진보적 서클인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가 발간하는 『신흥과학』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경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다. 또한 제4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동경 남부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뒤 귀국하여 1930년 6월 이종림(李宗林)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였다. 1931년 2월에는 고경흠(高景欽)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朝鮮共産黨再建設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국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검속이 치열해지자 대구로 몸을 피한 그는 일종의 연락기관으로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때 서인식(徐寅植) 등과 함께『코뮤니스트』·『봉화』등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 경남 양산(梁山)에서 조직된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慶南赤色農民組合 東部委員會)와 동년 12월 광주(光州)에서 결성된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지도하던 그는 1932년 3월 체포되어 1933년 4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1986) 제3권 220∼221·286·326∼327·330면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1986) 제5권 33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78∼279면
  • 騎驪隨筆(宋相燾, 1955) 361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509면
  • 現代史資料(姜德相, 1972) 제29권, 164면
  • 東亞日報(1932. 7. 10)
  •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한길사, 1991) 108∼111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241면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1976) 1335·140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대형 - 경상남도 하동(河東) 3·1운동,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 사건
본문
1898년 8월 28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君) 청암면(靑岩面) 궁항리(弓項里)에서 태어났다. 가계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알 수 없으나, 1919년 3월 24일 향리인 궁항리 근처 옥종면(玉宗面) 안계리(安溪里) 시장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 현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현 연세대학교) 에 입학하였다가 7월에 중퇴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4월 도쿄(東京)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으나 1926년 3월 퇴학당하였다. 1928년 6월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일월회(一月會), 동경조선청년동맹(東京朝鮮靑年同盟),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등의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재일본동경조선노동조합(在日本東京朝鮮勞動組合)의 회계검사(會計檢査)로 선출된 바 있으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정기총회에서 축사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속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내 각 대학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 연구단체인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7년 서울에서 신간회가 조직되자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8년 4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동경 남부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6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 2월 서인식(徐寅植)·김기선(金琪善)·이종림(李鍾林)·고경흠(高景欽)·김철환(金鐵煥) 등과 함께 “조선을 일본 제국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조선 내에서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의 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며 활동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이들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를 조직하고 구체적 활동 방안으로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조직, 출판물 발행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1931년 말부터 1932년 초까지 관련 출간물인 『코뮤니스트』, 『봉화』(제1호~제3호)를 배부하고 적색노동조합건설 대구협의회赤色勞動組合建設大邱協議會,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 인천의 노동조합 등 각지에 조직 건설을 지도하였다. 1931년 말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반제동맹(反帝同盟)의 기운이 고조되고 전국 각지에 반전반제(反戰反帝)의 격문이 붙게 되자 일제는 철저한 검거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3년 4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산입)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칙령 제19호에 의해 4년 7개월 14일로 감형되었으나, 장기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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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 출판법위반 징역 6년 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에 산입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33-04-20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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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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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일투사 추모탑(하동 옥종) 경상남도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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