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하동군(河東郡) 옥종면(玉宗面) 안계리(安溪里)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서울로 올라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24년 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도쿄[東京]에서 사상단체인 일월회(一月會)·재동경조선청년동맹(在東京朝鮮靑年同盟)·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등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진보적 서클인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가 발간하는 『신흥과학』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경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다. 또한 제4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동경 남부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뒤 귀국하여 1930년 6월 이종림(李宗林)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였다. 1931년 2월에는 고경흠(高景欽)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朝鮮共産黨再建設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국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검속이 치열해지자 대구로 몸을 피한 그는 일종의 연락기관으로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때 서인식(徐寅植) 등과 함께『코뮤니스트』·『봉화』등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 경남 양산(梁山)에서 조직된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慶南赤色農民組合 東部委員會)와 동년 12월 광주(光州)에서 결성된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지도하던 그는 1932년 3월 체포되어 1933년 4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1986) 제3권 220∼221·286·326∼327·330면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1986) 제5권 33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78∼279면
- 騎驪隨筆(宋相燾, 1955) 361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509면
- 現代史資料(姜德相, 1972) 제29권, 164면
- 東亞日報(1932. 7. 10)
-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한길사, 1991) 108∼111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241면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1976) 1335·14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