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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경에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71년 12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정산동(亭山洞)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명으로 김중량(金仲亮), 김동암(金東岩)이 있다.
1920년까지 비현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다. 이후 보합단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두 아들인 김덕하(金德河)와 김태하도 보합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김동식(金東植)이 중국 콴뎬현(寬甸縣)에 거주하며 사촌 김평식(金平植)과 함께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맥을 통하다가, 1920년 2월 대조선청년결사대(혹은 대한청년결사대)의 명의로 된 군자금 영수증 용지 수백 매를 갖고, 평북 의주군 비현면에서 백운기(22세), 안효준(24세)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들이 국내에서 활동을 본격화하려고 찾아오자, 즉석에서 찬성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화승총 2정을 제공하였다. 자택 뒷산 암굴을 임시본부로 하여 본격적인 조직체계 정비에 나섰다. 아들인 김덕하·김태하를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이때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본부는 선천군(宣川郡) 산면(山面) 내산동(內山洞)으로 하고, 단체명을 ‘대조선(대한) 독립 보합단’이라고 개칭하고 단칙을 제정하였다. 1920년 5월 9일에는 철산군 여한면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강탈하고, ‘적(敵)의 관리가 된’ 철산군 서림면 양책(良策)경찰관주재소 순사 송용범(宋龍範)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6월 초 의주군 고관면 동암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이곳에서 경고문, 군자금 영수증, 의용대 입대증, 임원 임명사령용지, 단칙 등을 인쇄를 하여 구비하였다. 체계적인 조직체로 총무 김동식 아래, 재무부·소모부·교통부·조사부를 두었다. 곧 친족인 김내홍과 김내범 형제, 김승옥·김내찬·김흥도·심창숙·김병규·조창화·심창업 등도 단원으로 입단하였다.
보합단은 2~3명을 1조로 하여 무기를 휴대하고 철산·의주·용천·선천 등지의 집들을 방문하여 1921년 1월 현재 독립운동 자금 6,750여만 원을 모았다. 이 중 일부를 안둥현(安東縣) 의성여관 김영율(金永律)을 통해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한편, 중국에서 직접 총기를 구입하고 폭탄도 제조하였다. 또한 군자금 제공을 거절하는 자, 관헌에게 밀고하는 자, 한국인 형사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9월 29일 김내찬·심창숙·한영구 등 10여 명과 함께 비현면 정산동의 전 순사인 문치무(文致武)의 집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2만 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하지 않자 민족을 배신하는 친일행위를 문책하며 김내찬 등에게 사형 집행을 명하였다. 이에 문치무는 처형되었고 첩과 장남은 중상을 입었다. 1920년 10월 2일 철산경찰서 수사대로부터 본부를 습격당하여 재무원 한우종(韓禹種)·이동원(李東元)·김응초(金應焦)가 사살되고, 백운기가 체포되었다. 이때 부상당하여 만주의 콴뎬현으로 피신하였다.
콴뎬현으로 피신한 후 김동식과 보합단 조직을 재건하였다. 단원으로 비현면 출신인 김승학(金承學)·김창수(金昌洙), 두 아들인 김덕하·김태하, 월하면의 김동항(金東恒)·김용준(金用俊), 고관면의 한이경(韓理景)·김순석(金淳碩)·김칠성(金七星)·한우종(韓禹種), 용천군 외상면의 정대개(鄭大個)·박초식(朴初植)·박완식(朴完植)·백도석(白渡錫), 용천군 읍동면의 조윤청(趙允淸)·최영기(崔榮基), 의주군 수진면(水鎭面)의 장학수(張覺守) 등이었다.
이후 대한진동도독부(大韓鎭東都督府) 무력대원으로도 활동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 후에는 베이징으로 갔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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