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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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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榮萬
이명 金斤, 金福汝, 秋峯, 金億萬, 金昌基, 田耕春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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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9 훈격 애족장
1920년 1월 서울에서 이달(李達), 백의수(白義洙), 이중각(李重珏)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시위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동년(同年) 7월 조선민단(朝鮮民團) 강연회에서 조선독립 사상을 선전하다 체포되어 동년(同年) 12월 징역 2년을 받았고 동년(同年) 8월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잡지 『신조선(新朝鮮)』을 반포하였다가 벌금 30원을 받았으며 1923년 11월에는 낙양관(洛陽舘)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노동계급 의식과 조선의 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1927년 러시아 노령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체포되어 10월경에 일경(日警)의 취조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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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영만은 일본 동경(東京)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유학하여 이달(李達) 등과 교유하였다. 1919년 11월 이달이 발행한 잡지 신조선(新朝鮮) 제1권 제1호가 일제에 의해 판매금지가 되었음에도 박명국(朴明國) 등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배포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1920년 귀국 후 2월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결성하고 간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동년 5월 조선노동대회의 별동조직인 조선민단(朝鮮民團) 결성에 참여하였다. 동년 7월 17일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개최한 조선민단(朝鮮民團) 강연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조선독립 사상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3월 서울청년회 간부로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준비했고, 7월 양말직공 파업 전말 강연회에서 ‘우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동년 8월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 및 조선일보 인천지국 후원으로 인천에서 열린 노동대강연회에서 ‘노동계급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 무렵 서울의 각 사회주의 단체 사이의 알력으로 발생한 소위 낙양관(洛陽館)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3년 11월 19일 경성지법에서 소위 가택침입 및 상해죄로 징역 1년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7월 출옥 후 소위 ‘서울파’의 간부로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10월에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민족부(民族部)를 담당하였고, 12월 사회주의자동맹회(社會主義者同盟會)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경성노동회(京城勞動會) 집행위원이 되었고, 서울청년회 주최 빠리콤뮨 기념강연에서 ‘콤뮨의 사(死)를 추억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달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在京朝鮮解放運動者團體) 연합간친회에 청년당사(靑年黨社)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이 되었다. 동년 6월 서울청년회 주최로 열린 중국동맹파업(中國同盟罷業) 지지 연설회에서 ‘중국동맹파업 소식을 듣고’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동년 8월 경북 예천(醴泉)에서 형평사원(衡平社員)과 농민 사이의 충돌로 발생한 소위 예천사건의 조사 및 중재를 위한 재경해방운동단체(在京解放運動團體)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0월 코민테른에 화요파(火曜派) 중심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결성에 반대하는 서울파의 견해를 전달하고 1926년 봄에 귀국하였다.

1927년 3월경 코민테른에 조선 내의 운동전선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그 해 여름 귀국하였다. 동년 10월경 러시아에서의 행적 등을 문제 삼아 일경에 의해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었다가 2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일명 春景園黨)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코민테른의 지부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 3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朝共再建設準備委員會) 발기회 결성에 참여하여 선전부를 맡으며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동년 8월 범태평양노동조합(凡太平洋勞動組合)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렇게 김영만은 몇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국내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東亞日報(1920. 7. 23·8. 1, 1924. 7. 10, 1925. 3. 14, 1925. 6. 19, 1927. 10. 15·10. 22·10. 27)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박과비평사, 1996) 9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678~679면, 제9권 149면, 제10권 11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2집 260~261면·1089~109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3집 150~15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권 113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7권 144면
  • 獨立示威運動計劃者 檢擧(1920. 3. 26)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5)
  • 先鋒(1927. 11. 12)
  • 時代日報(1924. 12. 8, 1925. 6. 19, 8. 20·8. 23)
  • 朝鮮日報(1923. 8. 25)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0. 12. 23)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20. 8. 2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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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만 추봉(秋峰, 秋峯), 김창기(金昌基), 김억만(金億萬), 전경춘(田耕春), 김근(金斤), 김복여(金福汝) 충청남도 논산(論山) 조선민단 강연회 설화사건, 낙양관 사건
본문
1891년 6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벌곡면(伐谷面) 한삼천리(韓三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추봉(秋峰)·(秋峯), 김창기(金昌基), 김억만(金億萬), 전경춘(田耕春), 김근(金斤), 김복여(金福汝) 등을 사용하였다.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이달(李達) 등과 교류하다가 학비가 곤란해지자 1918년부터 연필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였다. 결국 1919년 3월 학교를 중퇴하고 그 해 말경 국내로 들어왔다.1920년 1월 대구광문사(大丘廣文社) 사장, 대구민의소(大丘民議所) 소장 등을 지낸 김광제(金光濟)를 설득하여 2월 16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발기하였다. 그 즈음 이달·백의수(白義洙, 본명 (白初月)), 이중각(李重珏) 등과 몰래 논의하여 독립선언서를 국내와 도쿄의 한인에게 배포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사실이 일제 당국에 탐지되자 2월 24일 도쿄로 건너갔으나, 조선총독부가 도쿄로 연락하여 동지들과 함께 3월 9일 국내로 붙잡혀 왔다.1920년 5월 2일 광무대(光武臺)에서 개최된 조선노동대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총재 권직상(權直相), 회장 김광제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잡지 『노동(勞動)』을 간행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여러 차례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 즈음 조선노동대회의 별동조직인 조선민단(朝鮮民團) 결성에 참여하여 역시 간사로 활동하였다.조선민단 주최로 수차례 강연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1920년 7월 ‘설화(舌禍)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 그 직후인 8월 20일, 1919년 11월에 발매 반포가 금지된 잡지 『신조선(新朝鮮)』을 입수하여 도쿄의 유학생들에게 판매한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신문지법(新聞紙法) 위반으로 벌금 30원을 받았다. 그리고 위 ‘설화 사건’으로 인해 그 해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13일 개최된 조선노동대회 임시총회에서 임원진이 개편될 때 간부진에서 배제되었다.출옥 후 1922년 10월 서울청년회 내부에 공산주의그룹이 조직되었을 때 충청남도 오르그로 임명되었다. 1923년 2월 서울청년회 계열의 공산주의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이 창립될 때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임봉순(任鳳淳)·장채극(張彩極) 등과 함께 17인의 중앙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3월 서울청년회 계열의 전국적인 청년조직인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준비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청년당사(靑年黨社) 창립을 결의하고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이어 7월 양말직공파업 보고 강연회에서 「우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8월 경성노동대회에서 주최한 노동대강연회에서 「노동계급의 신사명(新使命)」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1923년 8월 24~25일 낙양관(洛陽館)에서 개최된 김약수(金若水)가 이끄는 일본 도쿄 유학생 조직인 북성회(北星會) 순회강연단의 연회(宴會) 자리에서 서울청년회 계열 성원들과 마찰이 빚어졌다. 이 ‘낙양관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그 해 1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가택침입·상해죄로 징역 1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924년 7월 출옥한 후 10월 고려공산동맹의 집행부 개편 때 민족부(民族部) 책임자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서울청년회 계열의 무력조직인 적박단(赤雹團) 결성에 참여하고 12월 북성회의 국내 조직인 북풍회(北風會) 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그 해 12월 6일 이영·정백(鄭栢)·이정윤(李廷允)·최창익(崔昌益) 등 50여 명과 함께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정되어 활동하였다.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화요회(火曜會) 계열과 서울청년회 계열의 마찰이 표면화될 때, 서울청년회 계열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서울청년회 계열이 전조선노동교육자대회(全朝鮮勞動敎育者大會) 개최를 준비할 때, 이낙영(李樂永)·임봉순 등 15인과 함께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 해 3월 조선노동대회가 경성노동회(京城勞動會)로 개편될 때 김사민(金思民)·이항발(李恒發)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서울청년회 주최로 개최된 파리코뮌 기념강연회에서 「코뮌의 사(死)를 추억함」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그 즈음 서울청년회 계열 11개 단체 대표의 참여로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在京朝鮮解放運動者團體) 연합간친회가 개최되었을 때 청년당사 대표로 참여하여 의장을 맡았다. 이 간친회에서 화요회 계열의 주도로 4월 20일 개최될 예정이었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에 대한 반대단체 전국연합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임시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발기를 위한 서무부 상무위원으로도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 해 6월 서울청년회 주최로 개최된 중국맹파(中國盟罷) 동정연설회에서 「중국맹파 소식을 듣고」 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8월 경기도청년연합회 발기준비회 선전부를 맡아 활동하였다.1925년 10월 고려공산동맹의 결정에 따라 최창익·이운혁(李雲赫) 등과 함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인 코민테른에 파견되었다. 먼저 그 해 12월 무렵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동양부(東洋部)로 가서 화요회 계열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반대하고 통일적인 조선공산당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1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2월 ‘서울청년회 내부에 현존하는 공산주의조직인 고려공산동맹 전권대표’라는 직함으로 북풍회의 신철(辛鐵),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의 이남두(李南斗) 등과 함께 통일적인 조선공산당 결성을 위한 제안서인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게」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해 봄에 귀국하였다.1926년 6·10 만세운동의 주도로 조선공산당원 다수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를 통해 안광천(安光泉) 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일명 ML당) 조직이 재편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같은 해 12월 서울청년회 계열에서 이영 등을 중심으로 별도의 조선공산당(일명 춘경원당)을 조직하자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7년 3월경 코민테른으로 가서 조선 내의 운동전선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 해 여름 귀국해 활동하던 중 1927년 9월 26일 잠시 동대문경찰서에 붙잡혔다가 10월 26일 풀려났다. 그 해 12월 20·22일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선공산당이 개최한 제3차 당대회에서 코민테른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에 1928년 3월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에게」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하고 코민테른 지부로 승인받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928년 들어 일제 당국의 잇따른 조선공산당 탄압과 코민테른의 「조선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일명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이 해체되게 되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9년 3월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에서 윤자영(尹滋英)·김철수(金綴洙)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선전부(宣傳部) 간부로 선정되어 기관지 『볼셰비키』를 발행하고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 민족해방운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 8월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사회주의계 노동조합운동의 지도기관인 범태평양노동조합(汎太平洋勞動組合) 제2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후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김규열(金圭烈)과 함께 위 재건설준비위원회의 러시아 파견 대표자가 되어 조선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1930년 11월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에서는 위원회의 일원인 최성우(崔成宇)로 하여금 재건설위원회의 선언을 최종적으로 감수하도록 하고 재건설위원회의 모든 업무를 접수하였으며, 이때 김규열과 함께 조선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구성원의 반응을 설명하였다. 한편, 1930년 3월 18일자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회의록」 에 따르면, 당시 ‘정치망명자’ 신분으로 변경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위원회에서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국제혁명가구원회(모플)에 치료에 필요한 약품(일시적 보조금) 지급을 요청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아 당시 투병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33년 11월 28일 ‘밀정’ 활동 혐의로 소련 당국에 붙잡혔다. 1934년 3월 27일자 합동국가정치부 산하 특별협의회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1934년 5월 21일 형이 집행되었다. 1989년 소련최고회의 간부회 명령 제1조에 의해 복권되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바간코프 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추정된다.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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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 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형사부 1920-12-23 국가기록원
2 인물카드 - - -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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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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