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4월 신간회 마산지회 서무를 역임하고, 동년 11월경 전국 각지와 부산 시내 공장 등에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4년 7월 마산노농동우회(馬山勞農同友會) 교무부 위원이 됐다. 같은 해 8월 김형선(金炯善) 등과 함께 마산공산청년회를 조직했으며, 10월 17일 제1회 정기총회를 통해 선전위원으로 선출됐다. 11월부터는 『조선일보(朝鮮日報)』 마산지국을 운영했다.
1925년 1월 마산독서회(馬山讀書會) 결성을 위한 규약제정위원이 되는 동시에 노농문고(勞農文庫)를 세웠다. 1월 13일에는 실행부 간사로 선출됐으며, 노농문고에서 모든 방면의 서적을 구입해 마산지역의 독서열을 향상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했다. 3월 14일 진주(晉州)에서 개최된 경남기자대회 대회준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회에서 경남기자동맹 간사로 선임됐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조직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서 서울에 갔다. 4월 17일에는 조선공산당, 4월 18일에는 고려공산당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4월 19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일본 경찰의 방해로 해산을 당하자 4월 20일 밤 9시경 붉은 기를 들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만세’, ‘무산자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8월 황수용(黃守龍) 등과 협의해 마산공산청년회를 고려공산당청년회로 통합하고, 고려공산청년회 마산야체이카로 개명했다. 동시에 제1, 제2 마산야체이카를 설치했다. 11월에는 마산청년연합회(馬山靑年聯合會) 집행위원이자 경남청년연맹 집행위원이 됐다.
1931년 4월 마산자유노동조합 집행위원, 5월 마산노농연맹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지속했다. 또한 4월 20일 신간회 마산지회 서무로 선출돼 활동했다. 11월에는 전국 각지와 부산 시내 공장 등에 항일적 격문을 배포하는 데 참여했다.
김상주는 1925년 4월 일명 ‘적기(赤旗)사건’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6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2월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붕괴의 계기가 된 ‘신의주사건’관련자로 체포됐다. 이로 인해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2월 19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석방됐으나 전국 및 부산지역 항일적 격문 사건으로 1932년 5월경 다시 체포됐다. 같은 해 8월 25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出版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5년 8월 25일 석방됐다. 그러나 석방 이후에도 공산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다가 1936년 9월경 재차 체포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5. 6. 8)
- 조총련연구(田駿,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제1권 1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