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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40125
성명
한자 權忠洛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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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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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8 훈격 애국장
1920년말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군정서(軍政署) 소속(所屬) 흥업단(興業團) 단장(團長)의 명으로 군자금 모집을 임명받고 귀국한 이만준(李萬俊)이 조직한 흥업단(興業團)에 1921년 입단, 권정낙(權政洛)·홍종낙(洪鍾洛)·박재하(朴在夏)를 권유하여 동단(同團)입단(入團)시키고, 1922년 1월 하순 홍종낙(洪鍾洛), 김종만(金鍾萬), 박재화(朴在華)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대구(大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위의 3인과 함께 경북(慶北) 영천(永川)의 부호 권주경(權周慶)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 실패하였고 다시 홍종낙(洪鍾洛)과 함께 경북(慶北)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지묘동(智妙洞) 부호 최재교(崔在敎)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펼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6년을 받았으며, 1943년 공출 관련 시국담을 유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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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권충락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 만주로 가 그곳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였다.

흥업단은 1919년 3월 만주 길림성(吉林省)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직되어 각 현(縣)에 지단을 설치하고 도만(渡滿)하는 한국청년들을 조직에 가입시켰다. 이렇게 모집된 단원들은 단장 김호(金虎)가 경영하는 백산학교(白山學校)에 보내는 한편,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단장 김호, 부단장 김혁(金赫), 총무 윤세복(尹世復), 재무 이원일(李源一), 경호 오제동(吳濟東), 교섭 김성규(金星奎) 등으로 구성되었고, 병농겸행(兵農兼行)의 시책으로 각처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하였는데 단원은 약 200명 정도였다.

권충락과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은 1920년 11월 20만원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단장 김호의 명을 받고 한교회(韓僑會) 회장 손경헌(孫庚憲)을 방문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김인제(金仁濟)·최성규(崔聖奎)·황문익(黃文益) 등과 권총 5정 및 실탄 90발을 소지하고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다. 이에 권충락은 1921년 음력 1월 손경헌으로부터 권총 2정과 탄환 수십발을 받아 가지고 함경북도를 거쳐 국내에 잠입하였다. 경남 밀양에서 권충락은 이만준과 재회하고 대구(大邱)·밀양(密陽)·양산(梁山) 등지를 거점으로 1922년 2월까지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1921년 1월 하순 권충락은 동지들과 대구 양한위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을 협의하였다. 이튿날 권총 2정과 약간의 탄환을 소지하고 경북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동(友鹿洞)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안내를 담당한 우홍기가 오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후 권충락은 1921년 8월 말경 권안이(權安伊) 집에서 이만준으로부터 중국 상해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10월경 이만준과 함께 권정락(權政洛) 집에서 김종만·홍종락·박재화에게 각자의 재산을 처분하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권충락과 김종만·홍종락·박재화 등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경북 영천군(永川郡) 신령면(新寧面) 권주경(權周慶)을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이라 대구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하순 권충락은 홍종락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서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지묘동(智妙洞)에 사는 달성부호 최재교(崔在敎)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각자 최재교집에 가서 "우리들은 상해 임시정부 파견 군자금 모집원이다"라고 하여 240원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22년 5월 경북경찰부에 의해 홍종락 등이 군위(軍威)에서 체포되면서 관련자 28명이 일경에 붙잡혀 흥업단의 국내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권충락은 흥업단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3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1924년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8년 8월 20일 출옥하였다. 권충락은 출옥 이후에도 더욱 항일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43년 3월 9일 대구의 결혼피로연 석상에서 일제의 새끼가마니에 대한 강제적 공출제도를 비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고 하여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권충락은 1943년 5월 14일 소위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구치감(拘置監)에 입감되어 그해 7월 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1월 1일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6권 929~932면
  • 在所者身分카드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934) 272~275면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24. 2. 20)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23. 11. 22)
  • 東亞日報(1922. 12. 2·12. 3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충락 - 충청남도 논산(論山) 흥업단 군자금 모집사건
본문
1890년 8월 27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김혁(金赫)·김호(金虎) 등 재만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다. 흥업단은 표면상 산업 진흥과 이주 동포 간의 친목 도모를 표방하였으나 사실상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 기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흥업단은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의 요새지인 푸쑹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할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였다. 또한, 주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 전쟁에 필요한 청년을 양성하고 강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전투 상황을 연출하였다. 흥업단을 이끈 인물은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인 김혁이었고, 그 뒤에는 대종교(大倧敎) 제2세 교조 윤세복(尹世復)이 이끌었다. 대종교 교인이 중심이 된 흥업단은 단장 김호, 부단장 김혁, 총무 윤세복, 재무 이원일(李源一)·오제동(吳濟東), 교섭 김성규(金星奎) 등으로 구성되었다. 병농겸행(兵農兼行)의 시책으로 각처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하였는데 단원은 200명 정도였다. 이후 흥업단은 1921년 10월 14일 군비단(軍備團)·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 등과 함께 통합되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조직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하 단체로 들어갔다. 1920년 11월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 단장 김호의 명을 받아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과 함께 한교회(韓僑會) 회장 손경헌(孫庚憲)을 방문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김인제(金仁濟)·최성규(崔聖奎)·황문익(黃文益) 등과 권총 5정 및 실탄 90발을 소지하고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다. 1921년 음력 1월 손경헌으로부터 권총 2정과 탄환 수십 발을 받은 뒤 함경북도를 거쳐 국내에 잠입하였다.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에서 이만준과 재회한 뒤 대구(大邱)·양산(梁山)·밀양 등지를 거점으로 1922년 2월까지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1921년 1월 하순 동지들과 함께 대구 양한위(梁漢緯)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을 협의하였다. 이튿날 권총 2정과 약간의 탄환을 소지하고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동(友鹿洞)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안내를 담당한 우홍기(禹洪基)가 오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921년 8월 말경 권안이(權安伊) 집에서 이만준으로부터 중국 상하이(上海)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10월경 이만준과 함께 권정락(權政洛)의 집에서 김종만(金鍾萬)·홍종락(洪鍾洛)·박재화(朴在華)에게 각자의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종만·홍종락·박재화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경북 영천군(永川郡) 신령면(新寧面) 권주경(權周慶)을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이라 대구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하순 홍종락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서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지사동(智沙洞)에 사는 부호 최재교(崔在敎)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함께 최재교의 집에 가서 “우리들은 상하이 임시정부 파견 군자금 모집원이다”라고 하여 240원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22년 5월 경북경찰부에 의해 홍종락 등이 군위(軍威)에서 체포되면서 관련자 28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될 때 함께 붙잡혔다. 1923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불복하여 1924년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겪고 1928년 8월 20일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43년 3월 9일 대구의 한 결혼피로연 석상에서 일제의 새끼가마니 강제공출제도를 비난였다. 그러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고 하여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5월 14일 이른바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구치감(拘置監)에 입감되었다. 그해 7월 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겪은 후 1944년 1월 1일 출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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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강도, 상해 면소 방면 대구지방법원 1923-10-16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강도, 상해 징역 6년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23-11-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강도 징역 6년 대구복심법원 1924-02-19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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