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남도 광주(光州) 사람이다.
기독교(基督敎)인으로서 1919년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김 철(金鐵)·최병준(崔丙浚)·최한영(崔漢泳)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日本東京)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가 청년들에게 알려지자, 최한영·김복수(金福洙) 등이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두는 등 일찍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관(參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서울 만세운동을 목격했던 김 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식 광경과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소상하게 전하자 바로 청년·유지 등에게 연락하여 이날 밤 양림동(楊林洞) 남궁 혁(南宮赫)의 집에서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과 최한영·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송흥진(宋興眞)·김용규(金容奎)·손인식(孫仁植)·김태열(金泰烈)·최정두(崔正斗) 등과 비밀회의를 열어, 김 철로부터 서울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정황을 알려주게 하고, 광주에서도 똑같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제안하자 모두가 찬성하므로 광주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각 학교 학생 및 주민의 시위참가 선전, 독립선언서의 등사·태극기의 제작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고 추진하는데 준비가 너무 짧아서 다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그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등사하고 거사 연락을 취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 넘었다. 이때 그는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연창(連唱)하면서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 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며,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일본 헌병·경찰은 감히 시위방해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자, 많은 경찰과 기마 헌병이 김 철 등의 주모자를 연행하였다.
이에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수까지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아울러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다.
그는 이때 체포되어 이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9. 15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87·2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55·556·55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