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3.4 충남 (忠南) 서천군 (舒川郡) 화양면 (華陽面) 금당리 (琴堂里) 에서 유재경 (劉載璟) 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3월 6~7일의 이틀간 화양면 (華陽面) 구동리 (九洞里) 거주 한백희 (韓伯熙) , 최경진 (崔敬鎭) 및 기산면 (麒山面) 화산리 (華山里) 거주 이경욱 (李敬旭) , 정희석 (鄭凞錫) 등에게「학생들은 국사 (國事) 를 위하여 지금 군산서 (群山暑) 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우리들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만세시위의 거사를 제안하고 준비를 갖추다가 피체 되어 3월 8일 압송되어가던 중 서천면 (舒川面) 삼산리 (三山里) 시장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하여 태 (笞) 90도 (度) 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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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4일 서천군 화양면(華陽面) 금당리(琴堂里)에서 유재경(劉載璟)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3월 6∼7일 이틀간 화양면 구동리(九洞里)의 한백희(韓伯熙)·최경진(崔敬鎭) 및 기산면(麒山面) 화산리(華山里) 이경욱(李敬旭)·정희석(鄭凞錫) 등에게 "학생들도 국사를 위하여 활동하는 데 우리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안, 준비를 갖추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3월 8일 압송 도중에 장터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해 4월 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4. 1 公州地方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13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