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온성군은 함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북만주 일대를 근거로 활약하던 독립군이 고국에 진입하는 첫 번째의 교두보였기 때문에 항일의식이 강열한 지방이었다. 온성군에서 만세운동은 4월 초에 일어났지만 3월 중순에 간도 지방에서 활약하던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와 일본 경찰과 수비대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전창우는 1919년 3월 말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이것을 베낀 후 3월 30일 영충면(永忠面)에 거주하는 김창욱(金昌旭)을 찾아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여 찬동을 얻었다. 4월 1일 전창우는 동지들과 만나 4월 4일 영충면 회덕동 회동교(懷洞橋)에서 시위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시위에 사용할 큰 태극기 1개와 작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시위 당일인 4월 4일 오전 전창우는 회동교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영충면사무소를 지나 북창평(北蒼坪) 시장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급보를 받은 북창평 헌병파견소에서는 즉시 현병을 출동시켜 이를 해산하려 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시위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시위 주동자는 체포되었다.
시위 후 체포된 전창우는 1919년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1919년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5. 21)
- 判決文(高等法院:1919. 6. 19)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7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106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