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함평(咸平) 출신이다.
1909년 국운은 날로 기울어 일제는 본격적으로 식민지화의 초석을 다지고 있던 시기이다.
이때는 일제의 끈질긴 의병 토벌전에 의해 의병운동도 패색이 짙어졌고 대규모의 의진 구성보다는 유격전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점에서 1909년 7월 하순경 양창국은 김 준(金準·泰元) 의진 휘하의 이강산(李江山) 부대에 입대하여 활약하였다.
8월 29일 함평군 대월면 내정리(大月面 內亭里) 산중에서 유진하고 있을 때, 나주 헌병 분견소 구밀 파견소의 밀정인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박복남(朴福男) 등 4명이 주막을 경영하는 이양삼(李良三) 집에 온 것이 탐지되었다.
이들은 평소에 이강산 의진의 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끼쳐 오던 존재라서 곧 제거되어야 하였다.
양창국은 동료 6명과 함께 이양삼의 집에 이르러 주민 2명의 협력하에서 그들을 난타하여 타살시키고 그 중에 박복남은 산중으로 연행하여 자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의병운동이 적에게 노정되어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양창국은 처음에 몸을 숨겨 피신하였으나 더 이상 은신생활을 지탱할 수 없어 일경에 자수하였다.
양창국은 동료와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1909년 12월 25일 광주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10년 4월 27일 끝내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46∼8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