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을미의병 때에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산남의진은 고종황제의 시종관으로서 황제를 모시던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아 의거할 것을 지시하여서 형성된 의진이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정하고 각 지방 대표를 임명하여 그들이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모으는 책임을 맡겼다.
이때 영천·신녕(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영덕·영해·영일·장기(長 )·진보·청송(靑松)·영양·봉화 등 영남의 제 고을이 그 대상지였다. 서주일은 남석구(南錫球)·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더불어 청송지구 소모 책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구성된 의병진이 이루어지니 의병진의 칭호를 산남창의진이라 칭하고 진중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대 장 정용기 선봉장 홍귀섭
중군장 이한구 후봉장 서종락(서주일)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이경구
소모장 정순기 우영장 김태언
도총장 이종곤
총 병력 2천 명이 넘자 북진을 계획하고 영덕의진의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손을 잡고 청하읍을 공격하였으며, 이어서 영천 자양(紫陽)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을 대파한 후 진로를 보현산맥으로 돌려 청송으로 향하였다.
이때 일군이 다시 침공해 와 신성(新城)에서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쌍방에 많은 부상자가 났으나 의병 부대는 이들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휴병하였다가 1907년 4월에 다시 거병하였으며, 8월 군대해산 이후 많은 해산 군인들이 들어와 의진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장영도소(將營都所)를 영일군 죽장면 매현리에 정하고 정예 의병 1백여 명을 이곳에 포진시켰다. 이 정보가 누설되어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하여 정용기·이한구·손영각·권규섭 등 주요 간부진이 모두 전사하였다.
그후 정환직이 대장이 되어 9월부터 11월까지 청송·자양·신녕·의흥·영덕 등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나, 정환직이 접전 중 득병하여 병을 치료하다가 12월 11일 체포되었으며, 12월 11일 영천 남교(南郊)에서 순국하였다.
1908년 영덕의진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서주일은 남석구와 더불어 의진을 재구성하여 진의 동쪽은 서주일이 서쪽은 남석구가 맡아 활약하였다.
의진에는 최성집(崔成執)·이구옥(李舊玉)·이만파(李萬波) 등이 참여하였으며 각기 50명 내지 1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성(義城)·안덕(安德)·포항(浦項)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말 경주·영천·의흥·청송의 수비대 등 합동 토벌대를 맞이하여 고와실(高臥室) 전투에서 의진은 큰 피해를 입고 의병운동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0·351·352·578·579·580·5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438·44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9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402·7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