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박두국은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고토리(古土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장진군은 고원지대라서 3·1운동의 소식이 비교적 늦게 전달되었다. 만세시위의 발생 빈도도 적고 또 그 발생 장소도 고토리(3월 14일). 초원(草原) 시장(3월 15일) 및 덕실리(德實里, 3월 19일)에 국한되었으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치열한 투쟁 양상을 보였고 피해도 매우 컸다.
장진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난 것은 3월 14일 고토리에서였다. 한영태(韓永泰)·한면각(韓冕珏)·이우승(李愚昇) 등 주민 200여 명은 오후 4시에 고토리에모여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다가 헌병주재소 앞에 이르러 더욱 소리를 높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헌병들은 시위대에게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마구 폭행을 가하였다. 격분한 군중들도 이에 맞서 큰 충돌이 벌어졌다. 헌병들은 군중에게 무차별사격을 가하였고 군중들은 헌병대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이때에는 이미 전신 시설이 파괴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 때 헌병보조원 1명이 탈출하여 하통리(下通里) 헌병대에 달려가, 시위대가 헌병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하통리 헌병대는 즉시 하갈리(下碣里) 헌병대의 지원 아래 고토리에 와서 시위 군중을 짓밟고 해산시켰다. 이때 체포된 사람만도 100여명에 달하였다.
이 시위로 체포된 박두국은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공소했으나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刑事控訴事件簿·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728~731면
- 每日申報(1919.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