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홍태식은 1900년 4월 28일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槐山面) 동부리(東部里)에서 출생하였다. 괴산보통학교(槐山普通學校) 4학년을 수료하고, 1918년 4월 1일 청주공립농업학교(淸州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였다. 청주공립농업학교 1학년에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그는 괴산에 있었다. 괴산에서는 홍명희(洪命熹)가 1919년 3월 15일 서울에서 돌아와, 자신이 직접 경고문·격문 등을 작성하여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300매를 인쇄하였다. 3월 19일 읍내에서 홍명희의 주동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세시위에 놀란 일경들은 시위 주동자 18명을 검거하였다. 체포된 홍태식은 학생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곧 풀려났다.
그후 홍태식은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1925년 5월 17일 지란성(吉林省) 닝안현(寧安縣) 성내에서 하얼빈(哈爾濱)에 근거를 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했다. 홍태식은 비서부(秘書部) 선전책임을 맡았다. 1928년 5월 청년총동맹 집행원이 되었다.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활동가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홍태식도 하얼빈 전가전(傳家甸)에서 중국공산당 북만위원회(北滿委員會) 황산저자지부(黃山咀子支部) 조사부 책임으로 활동했다. 1932년 5월 7일 임무심(林巫心) 등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홍태식을 비롯한 7명은 6월 21일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로부터 3년간 재류금지처분(在留禁止處分)을 받았다. 이들은 6월 27일 안동현(安東縣)을 경유하여 신의주경찰서로 이첩되어 그곳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 7월 4일 신의주경찰서에서는 하얼빈에서 체포된 7명 가운데 조철구·이대우·한영극·한영애 등 4명만 석방하였고, 홍태식·임무심·오춘성 3명은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7월 12일 신의주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은 3명도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24, 3. 26, 1932. 7. 6, 7. 7, 7. 14)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제13집 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