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국화리 출신이다.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양윤숙은 이에 호응하여 참가하였으나 남원 전투에서 최익현이 체포되어 실패하자 귀가, 은신하였다.
1907년 정미 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양윤숙은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회문산(回文山)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다.
도총독(都總督) 양윤숙 후 군(后 軍) 이국찬(李國贊)
좌선봉(左先鋒) 최 화(崔 華) 향 관(餉 官) 서기협(徐基俠)
우선봉(右先鋒) 임순호(任恂鎬) 교련관(敎練官) 한자선(韓自善)
중 군(中 軍) 최산흥(崔山興)
총인원 1천 2백여 명에 화승총 270정과 칼 30자루로 무장하였으며, 기병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표하였다.
의 격 문(義檄文)
난신들의 발호로 오백년 사직이 무너지고 삼천리 강토가 금수의 나라로 변했다. 개화장정(開化章程)은 선왕의 법도가 아니니 척화(斥和)의 대의 열사의 절의로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가 왔다.
비록 무기는 날카롭지 않으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의 충신이 된 대한의 난적들을 처단하고 말 것이다.
의소대장(義所大將) 양인영(楊寅泳)
중 군(中 軍) 최산흥(崔山興)
이리하여 1909년말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에 의거 일군에게 폭도괴수라하여 체포되기까지 적을 수없이 공격하여 그 용명을 떨치었다.
1908년 음 8월 향관(餉官) 서기협으로 하여금 부하 22명을 인솔하여 순창군 무림면 화암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게 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1908년 음 9월에는 중군 최산흥이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를 기습하기도 하였다.
1909년 음 정월에 후군 이국찬(李國贊)이 12명의 병력으로 서면 죽전리의 순창 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1909년 음 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이 병력 30명을 인솔하고 회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1908년 11월 22일에는 최산흥이 60명의 병력으로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의 왜군 기병대가 사용하고 있는 민가를 습격하여 소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양윤숙은 향리인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09년 가을의 소위 일군의 대토벌로 거점을 상실하고 은신하였다가 1909년 12월 3일경에 마침내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김제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체포당시의 경찰조서에 따르면 부하 의병에 대해서는 일제 함구하였다고 하며 국가를 위해 죽을 따름이라고 소신을 밝혔으나 일제는 이를 왜곡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양윤숙에 대한 죄목이 소위 내란죄였으며 이에 방화죄를 추가하여 교수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숙의 순국일자는 1910년 4월 14일 광주 감옥 전주분감에서였으니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내각고시 49호(관보)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권 315·644·645·792·79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88·8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3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