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광주 서중학교 재학중인 1938년에 동교생 주만우(朱萬尤)·유몽룡(劉夢龍) 등과 함께 항일학생결사 서중독서회(西中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서중독서회의 항일정신은 서중의 전신인 광주고보의 독서회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목적한 학생결사였다. 이러한 서중독서회는 1940년 3월에 그 명칭을 무등회(無等會)로 바꾸고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1941년 3월, 광주서중을 졸업한 그는 담양제재주식회사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계속 유몽룡·주만우 등과 연락을 가지며 무등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1월에 무등회의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그는 주만우·유몽룡·남정준(南廷埈) 등과 함께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1년여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구금된 채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에도 무등회의 활동은 주하준(朱夏俊)·기환도(奇桓度)·기원흥(奇源興) 등에 의해 계승되어 나갔다. 이무렵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전시체제의 수탈을 강요하는 한편 민족언론을 봉쇄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면서 민족말살을 꾀하였다. 따라서 항일운동을 표면적으로 전개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무등회의 항일운동의 양상은 겉으로는 교풍쇄신을 표방하며 위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3년 5월, 주동학생들의 활동이 일경에 탐지되어 검속을 당하게 되자, 이때 무등회를 중심한 광주서중의 학생들은 학병지원반대·창씨개명반대·일어상용반대·징병제도반대 등을 내어 걸고 동년 5월 21일에 일제히 동맹휴학에 돌입하여 동년 6월까지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였다. 이를 세칭 광주서중의 제2차독립운동이라고 하는데 이때 그는 무등회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취조과정에서 일경의 잔학한 고문에 의하여 1944년 4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06·81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