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0년 10월 21일
3. 1925년 3월 10일
(
4.
5.
6. 1926년
7.
8. 1932년 2월
9. 1932년 1월
10. 1937년
- 교전(交戰) : 서로 병력을 가지고 전쟁을 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백종열(白鍾烈)·박영희(朴寧熙)·김춘식(金春植)·강화린(姜化麟)·최 해(崔海)·이운강(李雲崗) 등과 함께 김좌진(金佐鎭)의 초청으로 북로군정서에 독립군 장교로 임명되어 사관양성소의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9월 9일에는 사관양성소의 제1회 졸업생 298명을 졸업시켜, 보병 1개대대가 편성되자 김사직(金思稷) 대대장 지휘아래 그는 김규식·홍충희·김창수 등과 같이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10월에는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에 참전하여 김좌진사령관 휘하의 제4중대장으로 서 백운평(白雲坪), 갑산촌(甲山村), 어랑촌(漁郞村), 천수평(泉水坪)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독립전쟁이후 노·만 국경지대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조직되자 부대를 따라 노령으로 갔다. 그러나 소련 정부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자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되돌아왔다.
1925년 3월에 김좌진(金佐鎭)·김 혁(金赫) 등이 중심이 되어 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하여 북만 영안현(永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자 제2대대장에 임명되어 백종열(白鍾烈)·문우천(文宇天)·장종철(張宗哲)·박두희(朴斗熙)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목릉현 소추풍(穆陵縣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게 되자 교장에 김 혁(金赫), 부교장에 김좌진(金佐鎭)이 임명되었으며, 그는 박두희·백종열 등과 함께 교관으로 독립군 인재 양성에 전념하여 이곳 졸업생들은 국내 특파원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었다.
한편 길림성 육군사관학교 학생단장으로, 1926년에는 대한독립군단 위원 및 신민부 경호대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에는 길림성 자위군대대장(吉林省 自衛軍隊隊長) 및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 군정위원 등으로 무장항일 투쟁을 하였으며, 강국모(姜國模)사령 휘하에서 중국구국군 사령 이 두(李杜)의 협조를 받아 대한구국의용대를 조직하여 일군과의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1937년에 산현(山縣) 지방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75·366·385·514·52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3·32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970·975·976·978·105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45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9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87·108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