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남 강동(江東) 사람이다.
13세까지 한문을 수학하다가 신교육에 눈을 뜬 그는 상경하여 고학으로 실력을 길러 1901년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신의학을 배우는 한편, 밤에는 천도교 교리강습소(天道敎敎理講習所)에 나가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09년 11월 이재명(李在明)이 서울로 찾아와 "합방을 깨뜨림에는 오적(五賊)의 괴수 이완용(李完用)과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죽여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거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하자 즉석에서 이를 승낙하고 수일 후에 거사준비를 위해 평양으로 가서 이재명과 동지 김정익(金貞益)·이동수(李東秀)·전태선(全泰善)·이응삼(李應三)·조창호(趙昌鎬)·김용문(金龍文)·김병록(金丙錄)·박태은(朴泰殷) 등과 누차 협의한 결과 이완용과 이용구를 동시에 처단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고 이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재명·이동수·김병록은 이완용의 처단을 담당하고, 김정익·조창호는 이용구 처단을 담당하였으며 그는 박태은·이응삼과 함께 자금조달의 임무를 맡아 서울로 올라와 비밀리에 각처로 다니며 자금을 구해 거사용 무기의 구입과 운반을 책임진 조창호에게 주어 거사할 때 입을 학생복과 무기를 구하게 하였다.
1909년 12월 17일 그는 이재명의 숙소에서 동지들과 함께 거사계획의 점검을 위한 최종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전에 결의한 이완용·이용구의 동시 처단계획을 변경하여 호위가 엄중한 이완용을 처단하고 계속하여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결정한 다음 무기와 복장을 분배하고 이 사실을 이완용·이용구의 동정을 살필 임무를 띠고 극비리에 활약중인 김용문에게 전하였다. 이때 12월 20일 김용문으로부터 "금년 12월 22일 이완용이 매국각료들과 함께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간다"는 연락이 왔고 12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이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찌르고 붙잡히자 그도 연루자로 붙잡혀 1910년 경성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후 고향에서 잠시 정양하였으나 일경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충북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가 자제들에게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다가 해방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5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2면
- 매천야록 532면
- 대한계년사(하) 40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475∼477·482∼485·490·502·522·523·529·554·555·559·561·562·566·5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