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상북도 영일(迎日)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늑결됨에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시종관으로 황제 측근에서 일하고 있던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하향시켜 거사케 하고 자신은 서울에서 후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손영각은 정용기·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정하였다. 이들은 일찍이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한 사이였다. 먼저 민중들에게 알기 쉬운 권세가(勸世歌) 등의 노래를 지어 돌려서 애국정신을 일깨우고 고무하며 한편으로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였다. 손영각은 정용기·이한구·정순기와 더불어 영천(永川)의 본부에서 모든 일을 계획지도하였고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夏)·이창송(李蒼松) 등은 각 지방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계획 진행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영천을 중심으로 신녕(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영덕·영해·영일·장기(長 )·진보(眞寶)·청송(靑松)·영양·봉화·예안·안동·비안(比安)·군위(軍威)·하양(河陽)·대구·현풍(玄風)·청도(淸道)·창령(昌寧)·울산·언양·밀양·지례·고령·인동·칠곡·금산·성주·상주·선산·경주 등 영남지방 전체에 걸치는 의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의진의 이름을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이라 하였다. 의진이 형성되자 1906년 3월에 진중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 대 장 정용기 선봉장 홍귀섭(洪龜燮) 중군장 이한구 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소모장 정순기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연습장 이규필(李圭弼) 그밖에 도포장·좌익장·우익장·좌포장·우포장·장령 집사·군문 집사 등의 부서를 둔 강력한 의진이 형성되었다. 3월 5일 그들은 비로소 의진의 깃발을 높이 들고 행군을 시작했다. 고향을 출발하여 동해 쪽의 여러 고을을 쳤다. 이때 영해(寧海)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던 신돌석(申乭石, 泰浩) 의진과 연합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장차 서울을 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4월 28일 청하(淸河)로 진격하던 중 우각마을(神光面牛角洞) 앞에서 경주 관군의 참령(參領)인 신석호(申錫鎬)의 글을 받았다. '경성에서 어떤 고관이 잡혔다고 하는데 그가 혹시 정환직 공이 아닌가' 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정용기는 아버지가 옥에 갇혔다는 소문에 놀라 곧 경주로 갔다. 이것은 정용기를 체포하고자 한 계략이었다. 결국 정용기는 대구에서 체포되었으나 8월 3일에 부친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그후 정용기가 병석에 누웠으므로 그 동안 의진은 여러 가지 불리한 형세로 말미암아 7월 하순경 훗일을 기약하고 일단 해산하고 말았다. 1907년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음력 7월부터 다시 진용을 재정비하고 7월 12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두 번 청하(淸河)를 공격하고 일본 헌병을 죽이며 헌병 분파소를 불태웠다. 이때 정용기의 고향인 자양(紫陽) 땅에 일군이 들어왔으므로 진머리를 돌려 이들과 싸워 무찔렀다. 그날 정환직이 하향하여 장차 북상할 계획을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8월 15일 전군을 운주산(雲住山) 아래 상귀원(上龜原)에 집합시켜 북으로 진격할 일을 의논했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아직은 무기와 탄약도 부족하며 또 겨울을 앞두고 옷도 허술하니 좀더 준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에게 10일간의 휴가 겸 준비할 기회를 주고 본진의 의병 100여 명만을 거느리고 죽장면(竹長面 梅峴里)에 주둔하였다. 9월 1일 밤 입암(立岩)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날 아침 매현리에 자리잡은 장영도소(將營都所)에서는 불길한 징조가 감돌았다고 한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장기(將旗) 두 개가 부러진 것이다. 그래서 군졸들은 모두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으나 대장 정용기가 오초(吳楚)의 고사를 들어 그것이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효유하였다. 그러나 산남의진의 본영이 죽장에 자리잡고 있음을 탐지한 일군은 청송(靑松) 방면으로부터 넘어와 입암에 들어왔다. 때마침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김일언(金一彦) 등이 거느린 의병들이 장영도소의 의병들을 이끌고 새벽에 급히 들이쳐서 적을 모조리 무찌를 계획이었다. 세 부장은 각기 의병을 거느리고 작정된 장소로 향하였다. 이세기 부장이 광천(廣川)으로 갈 때 일군 수명이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이세기부장은 그것이 적의 전병력이라고 잘못 알고 이것쯤이야 생각하고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군의 취사반이었고 적의 주력은 유리한 지점에 매복해 있었다. 일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음력 초하루라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유리한 지형에 붙어서 우수한 무기로 집중 사격을 하는 일군을 의병은 당해 낼 수 없었다.
매현리 본진에서는 미처 상황을 판단하지도 못하고 우선 나와서 응전하였다. 우리 용사는 용전 분투하였으나 하나 둘 쓰러져 갔다. 이 전투에서 참모장 손영각을 비롯하여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좌영장 권규섭 등 의병 부대의 주력이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정환직은 아들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나머지 잔병들을 이끌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청송·영일·흥해·신녕·의흥·영덕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끝내 12월 11일 적에게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산남의진의 잔여 병력은 끝까지 적과 전투를 계속 전개하여 의병사에 산남의진의 이름을 크게 날렸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40·141·142면
- 산남창의지 하권 8~18·21~3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0·351·352·353·386·387·579·580·581·5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