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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301
성명
한자 奇宇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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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80 훈격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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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895~1908 전후기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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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본은 행주이며 벼슬은 참봉(參奉)을 하였으며,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가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대받았다. 을미(乙未) 정미(丁未) 의병운동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그는 실전(實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상소를 올려 일제에 의한 개혁을 혁파하고 구제(舊制)로 환원할 것을 청원한다든지, 각지에 격문을 돌려서 투쟁할 것을 호소하여 호남의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남긴 글에서 의병전쟁에 참여한 당시 유생들의 위정척사 사상의 전형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기우만은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생각하면서 유생들 가운데 그 지조를 지켜 이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을 매우 기특하게 여겨 칭찬해 주고 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유생들이 자정(自靖)하지 못하고 지조를 굽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기우만 자신의 경우에는 농민군들이 들이닥쳤으나 그의 집이 학자의 집이라 하여 농민들이 스스로 약탈을 삼갔다는 것이며, 기우만이 책을 읽다가 나가서 농민들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기우만의 인품에 감동한 농민군 대장이 자신의 무리를 바칠 터이니, 그들을 이용하여 "서양놈과 왜놈을 물리치면 좋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기우만은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나무라며 자수하라고 권했다. 그렇게 의연하던 그가 몇 년 후에는 스스로, "왜놈 양놈을 몰아내어 영원히 수모를 막아내기로 하자" 고 각 처에 통문을 보내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기우만은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 말하고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올렸다.

신은 삭발령을 들은 후부터 문을 닫고 식음을 전폐하며 장차 자결하여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맹서하였사옵니다. 대개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면 신자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와신상담해야 할 것인데 나라 형세가 날로 깎이어 설욕할 가망이 없사옵고 전장(典章) 문물은 바로 역대 선왕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옛 제도이온데 하루아침에 개혁하여 다시 볼 기약이 없사오며 지금 머리까지 깎는 데 이르러는 변란이 궁극에 달했습니다. 무릇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도 욕된 일이지만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 망하는 것보다 더하옵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물론 가증스러운 일이지만 머리 깎는 그 가증함이 죽는 것보다 더하옵기 때문에 나라가 차라리 망하고 사람이 차라리 죽어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이것은 일찍이 1881년에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총수 역할을 하던 활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으로 당시 단발령에 대한 유림인사들의 전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1896년 1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격문을 받고서 분연히 일어나 각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할 계획을 세웠다. 1월 29일에 나주(羅州)에 도착한 통문의 대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을 시기하고 정의를 방해하는 행동은 역적의 무리로 규정지으며,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의(義)는 이미 글월에 밝혔으니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로 날짜를 정하여 각기 소속 관하에서 대의에 호응하는 민병(民兵)을 모집하되, 선비들은 그 규율을 봉행하고, 이교(吏校)들은 그 두령에게 복종하라. 지휘와 절제는 스스로 계획을 정하고 궁시(弓矢)와 총칼을 모두 대비해서 난폭한 자를 제거하여 이 위급한 내란을 밝히고, 왜놈, 양놈을 몰아내어 영원히 외적의 수모를 막아내기로 하자···

대략 이상의 통문을 받은 호남 각 고을의 선비들이 호응하여 몰려왔다. 2월 향교(鄕校)에 들어가 의병 일으킬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각 읍 경영(京營) 완영(完營)에 통고하기를 "머리를 깎이고 울부짖는 것은 모두 양심의 발로라 인정하고 빨리 개과 천선하여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드디어 고광순(高光洵) 기삼연(奇參衍) 기주현(奇周鉉) 양상태(梁相泰) 기동관(奇東觀) 이승학(李承鶴) 기 재(奇宰) 기동노(奇東魯) 등을 거느리고 2월 11일 나주(羅州)로 나아갔다. 나주는 동학농민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병사(兵事)에 능하고 의기 있는 사람이 많은 고장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임진년에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이 의거한 바 있던 항일정신의 본고장이었다. 2월 16일 건재의 사당에 제를 올리고 제문을 지었다.

아! 우리 선생이시여 산하의 기운을 받아 나셨네.

도학도 훌륭하시거니와 절의마저 겸했구려.

저 옛날 임진년에 나라 운수 비색하여

선생이 먼저 외치자 의병이 모두 일어났네······

(우리도)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원수 갚기를 맹세했소.

머리 위로 저 하늘에 흰 해가 내리 비치고

귀신에게 질문해도 이 길이 옳다 하네.

선생께 여쭤도 의혹될 것 없으리다.

이 때에 호응하여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심의(深衣)를 입고 대관(大冠)을 쓰고 서로 읍양하며 서열을 지키며 나아갔다. 그러나 군량과 무기가 없고, 기율(紀律)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모두 향리의 거족들로서 글 읽던 유생들이라 전투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2월 30일 광주에서 집합하기로 약속하고 22일 광주로 행군하여 향교로 들어가 몇 차례의 상소를 올려서 구제도와 구신(舊臣)을 쓸 것을 건의하였다. 그 동안 송사는 산에 들어가 의분과 정열을 악부(樂府)짓는 데에 바쳤다. 1900년 7월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제수하고 주임관(奏任官)으로 승진시켰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것은 참정 신기선(參政 申箕善)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는데 송사는 신식 벼슬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상소조차도 올리지 않게 되었다. 문인 허 간(許 幹)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물어 보니, "나는 본시 위인이 오활하고 학식이 허소하여 비록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나아갈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이 때가 어느 때이냐"하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1904년 광주로 이사하고, 1905년 1월 도약정(道約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것은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향약(鄕約)을 신설하고 추대한 것인데 이도재의 거취가 불분명하므로 나아가지 아니한 것이다.

10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소문을 올려서 처음부터 개화정책에 잘못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매국적들을 제거하고 구제도로 돌아갈 것을 또다시 역설하였다. 이어서 "나라가 무너졌는데 학당(學堂)이 있어서 무엇하리"하며 학당을 허물었다. 1906년 1월 각 읍에 통문을 보내어 곡성(谷城)에서 회집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청국에 청원하고자 출국할 길을 모색하였으나 감시가 삼엄하고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하여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일로써 10월 광주 경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출감하였다. 그러나 1907년 1월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성암 김상기(省庵 金相琦)·금포 이항선(錦圃 李恒善) 등 의병이 송사를 찾아와 순천(順天)에서의 패전에 관하여 의견을 나눈 일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3월에 다시 영광(靈光) 경무서에 수감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4월에 목포 경무서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는 중에 일인들은 끊임없이 회유하고자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한반도를 일인이 통치하는 것은 개화(開化)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라며, 을사5적에 대한 그의 감정을 탐지하고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었지만, 송사는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구속 기소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설득하고자 한 것은 호남의진에서의 송사의 영향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9년에는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모두 패배하고 오히려 득세한 무리들이 의병을 폭도라 지목하고 사람들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하였기 때문에 머지않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게 될까 우려하여 그 기록을 전하는 일을 시급하게 여기었던 까닭이다. 대체로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김봉규(金奉奎)

김용구(金容球) 박경래(朴慶來) 전수용(全垂庸)

김영엽(金永曄) 김익중(金翼中) 김치곤(金致坤)

박영건(朴永健) 정원숙(鄭元淑) 성경수(成卿洙)

등의 약전을 기술하였다. 이들은 일찍이 그가 보낸 통문에 호응하여 의기를 떨친 의병장들이었다.1910년 5월 경연(經筵)에서 송사의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정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증직하였다.이것은 마지막 숨을 몰아가던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 그의 상소문을 통한 애국충정에 대한 말없는 보상이었던 것이다. 7월 국망하였다는 비보를 접하자 토굴(土窟)속에 은거하고 종신토록 일화배척(日貨排斥)과 각종 세금을 불납하는 등 개인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박성수) 26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7·595~67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4면
  • 항일의병시집(신동환, 서문문고 193) 41· 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1·25·27·34·35·37·38·40·43·44·46~56·65·66·75·77·78·79면
  • 매천야록 19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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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기우만 자 : 회일(會一), 호 : 송사(松沙), 이명 : 기참봉, 기산림(奇山林) 전라남도 장성 -
본문
1846년 8월 17일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황룡면(黃龍面) 탁곡(卓谷)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字)는 회일(會一), 호(號)는 송사(松沙)이다. 기참봉·기산림(奇山林)이라고도 불렸다. 조부는 호남에서 위정척사의 지주로 이름이 높았으며, 관직으로는 참판을 지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다. 부친은 기만연(奇晩衍)이며,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첫째인 기우기(奇宇夔)와 둘째인 기우번(奇宇蕃)은 일찍 사망하였고, 동생으로는 기우몽(奇宇蒙)과 기우훤(奇宇藼)이 있다. 넷째인 기우훤도 두 형과 마찬가지로 일찍 사망하였고, 막내인 기우몽도 먼저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지만 가학(家學)을 이어 조부의 사상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1862년 남원군 하사리(下沙里)로 이사하여 17세의 나이로 삭령(朔寧) 최씨(崔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문집으로 『송사집(松沙集)』 52권을 남겼다. 관력으로는 1870년 진사 식년시에 입격하여 25세에 진사가 되었다. 1882년 익릉참봉(翼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887년에는 찬양(贊襄)에 제수되었으며, 1900년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추천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또한, 호남의 문유(文儒)로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궁내부 주사를 지낸 하해통(河海通), 중추원 의관을 지낸 노한걸(盧漢杰)·유건영(柳健永) 등이 있다. 의병 운동의 사상적·인적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화서학파의 일원으로 호남 지역 의병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최익현(崔益鉉)과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1874년 고양군(高陽郡) 원당읍(元堂邑) 성사리(星沙里)에 있는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의 묘소를 다녀오면서 최익현을 만나 학문을 논함으로써 후일 의병 운동에서 연합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1878년 국가로부터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다고 하여 표창을 받을 정도로 학문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학문적 능력을 배경으로 1879년 조부 기정진이 사망하자 노사학파(蘆沙學派)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호남 지역 위정척사운동과 의병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881년에는 의병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위정척사운동인 만인소 운동을 노사학파의 영수로서 호남을 대표하는 화서학파의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함께 주도하였다. 1883년에 장성 담대헌(澹對軒)에서『노사집(蘆沙集)』을 간행하여 조부의 저술을 정리하였다. 1884년에는 김평묵이 찾아와 만인소 운동 이후 활동 등 시국에 대해 논하였다. 이후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1888년에 부모의 자식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유설(拘乳說)』을 저술하였고, 1890년에는 『답문류편(答問類編)』을 편찬하였다. 한편, 유학자로서 동학(東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유생들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농민군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의리로써 동학농민군을 설득하였다. 이에 감복한 동학농민군 대장이 군사를 바칠 테니 ‘왜놈을 물리쳐 달라’라고 하자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나무라며 자수하라고 권하였다’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95년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것을 기념하여 나주에 ‘나주평적비(羅州平賊碑)’를 세울 때 비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895년 러시아 주도의 삼국 간섭 이후 조선에서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친러·친미 정책이 추진되자 일본은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려고 그 중심에 있던 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 소식을 접한 후 복수를 위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시기 친일 정부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시행하였다. 이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고,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라고 분개하면서 곧바로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 단발령 철폐, 옛 제도의 복구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국왕이 왕궁을 떠나 외국 공사관에 머무는 상황을 또 다른 위기로 인식하여 의병 봉기를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음)정월 전라도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였다. 격문은 1896년 (음)정월 29일 나주에 도착함과 동시에 담양·창평·광주·장성·순창 등지에 전해졌다.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격문을 알리고 교임(校任)과 공형(公兄)을 중심으로 의병에 가담할 명단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영남의 예안(禮安)·안동(安東)에서 발송된 통문이 이 무렵 장성에 도착하였고, 유인석(柳麟錫)의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도 장성에 전해졌다. 특히, 유인석은 그에게 남쪽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성리학적 도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드디어 1896년 (음)2월 7일 장성에서 고종의 환궁과 개화파의 처단, 옛 제도 회복, 복수토적(復讐討賊)을 주장하며 조부 기정진의 문인인 정의림(鄭義林)·기재(奇宰)·기삼연(奇參衍)·이승학(李承鶴)·김익중(金翼中)·박원영(朴源永)·기동관(奇東觀)·고광순(高光洵) 등과 장성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곧바로 나주의병과 연합하기 위해 (음)2월 11일 나주로 이동하였다. 나주에 입성한 후 나주향교에 주둔하였다. 그곳에서 나주의병과 연합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지휘권에 대한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이 문제는 장성과 나주의 유생들이 중재하여 장성의병은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 나주의병은 나주의소(羅州義所)로 결정되어 지휘권에 대한 갈등이 해소되었다. (음)2월 14일에는 나주의 민고(民庫)에서 모든 장졸, 의유(義儒)와 함께 의병으로서 예를 갖추었다.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의병장인 김천일(金千鎰) 사우(祠宇)의 옛터에 단(壇)을 설치한 후 제문(祭文)을 바쳤고, 나주의 진산(鎭山)에 위치한 금성당(錦城堂)에서 제사를 지낸 후 출병을 알렸다. 의병부대를 출범시킨 직후 나주향교를 주둔지로 삼고 읍치를 거점으로 확보한 후 북상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동시에 의병을 일으킨 목적을 담은 상소를 국왕에게 올렸다. 또한, 선유사와 친위대가 의병을 해산할 목적으로 전주에 내려왔을 때 친위대에게 근왕척왜(勤王斥倭)하자는 「효고문(曉告文)」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규모 의병부대의 결성을 위해 (음)2월 말에 광주(光州)에 집결하자는 통문을 각 읍에 전달하고 이동하여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하지만 모인 자들은 모두 기다란 옷에 큰 갓을 착용한 유생뿐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였기에 나아가고 물러설 때는 반드시 순서를 지켰으나 군량과 무기가 없는 데다가 군의 기율이 확립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남군수 정석진(鄭錫珍)이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에게 피살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호남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국왕의 선유를 내세워 설득하자 일본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유학자로 국왕의 명을 어길 수 없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킬 때의 명분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이라고 쓰지 못하고, 장(葬)이라고 쓰지 못하면 상복을 벗지 못한다’라는 「춘추(春秋)」의 대의에 따라 백립(白笠)과 상복(喪服)을 입고 담대헌이 바라보이는 장성의 삼성산(三聖山)에 들어가 삼산재(三山齋)를 짓고 은둔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병을 해산한 후에도 고종이 계속해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등 정부의 조치가 미흡하자 이를 지적하는 상소를 1896년 (음)5월에 올렸다. 그러나 상소에 대해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이에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10월 16일 체포되어 옥고를 겪고 1897년 4월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주로 문집 작업을 진행하여 1898년에 『노사집』을 중간(重刊)하였으며, 1902년에 정재규(鄭載圭)를 비롯한 노사의 문인들과 더불어 자료를 보충하여 단성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으로 삼간(三刊)하였다. 1899년에 기준(奇遵)의 『덕양유고(德陽遺稿)』를 『복재선생문집(服齋先生文集)』으로 제목을 바꾸어 간행하였다. 또한, 인적 교류를 추진하여 1901년 11월에 최익현을 찾아가 기정진의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1904년에는 광주 갈전면(葛田面) 주흥동(朱興洞)으로 이사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군 12사단을 서울로 진격시켜 점령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는 등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8월에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면서 토지 침탈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5년 8월 원용팔(元容八) 의병장이 원주 주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전국에 통문을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지역별 의병 봉기에 대해 논의할 때 서신을 주고받으며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원용팔 의병장과 서신을 통해 의병 운동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에 최익현이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 유회(儒會)를 설치하여 의거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자 이에 호응하였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부당성을 알리고 일본과 싸우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초(楚)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진(秦)나라가 아니라 자란(子蘭)이었으며, 오(吳)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월(越)나라가 아니라 백희(伯嚭)였다’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을사늑약에 찬성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해 단죄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와 함께 열강의 공사관에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성을 호소하는 서신을 보내 외교적인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마지막 선택으로 청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고자 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06년 정월 정재규 등과 곡성(谷城) 도동사(道東祠)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향교와 향약소(鄕約所)를 중심으로 각 면리까지 의병을 모집하는 통문을 돌렸다. 이어 3월에는 「만인회동진소통문(萬人會同陳疏通文)」을 각 군에 돌렸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고 창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5월 29일 전남 담양 추월산(秋月山)에 위치한 용추사(龍湫寺)에서 최익현·김병로(金炳魯) 등과 만나 대일 항전의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연합 의병을 추진하기로 하고 최익현의 이름으로 격문을 작성하여 각 군에 발송하고 동맹록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투쟁 방법으로 상경상소, 연명상소, 열강에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 일제를 성토하는 활동 등을 주장하면서 최익현과 의병 방법론과 목적, 주도권 문제로 입장 차이가 발생하였다. 결국 연합 의병은 출범하지 못하고, 각 군에 격문을 발송하고 동맹록을 작성한 것에 만족하였다. 이어 6월에는 서해로 이동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넘어가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10월에는 의병과 내통하였다고 하여 광주경무서에 체포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이후 일제의 감시 속에 지내다가 1907년 3월 의병과 내통하고 의병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혐의로 장성에서 다시 체포되어 영광경무서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목포를 거쳐 서울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의병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7년 (음)8월 내장산의 연암사(혹은 백양사, 내장사)에 김동신·고광순 등과 모여 의병 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합 의병을 추진하지는 못하고 강력한 일본군을 분산·약화시키기 위해 의각지세(犄角之勢)의 계책을 추진하여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의병 전쟁이 크게 위축된 1909년에는 성리학적 의리사관에 입각하여 의병의 정신과 행적을 후일에 남기고자 역사의 편찬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호남의병의 정신과 행적을 기록한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이 탄생하게 되었다. 의병 전쟁이 끝나가던 1910년에 태극교(太極敎)의 13도 도훈장(都訓長)·부훈장(副訓長) 선정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사림의 자존과 의리를 끊기 위해 강제로 지급된 은사금(恩賜金)을 피하려고 방장산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가 얼마 후 사촌이 사는 남원 대강면 사석리로 이사하였다. 1912년에는 함께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던 중암 김평묵의 별집(別集)에 발(跋)을 작성하였다. 1914년에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1912년에 조직된 독립의군부의 전라도 선유사로 임명되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에도 호남 일대에서 의병 운동을 이은 비밀결사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노사학파의 종장으로 호남 일대에서 지속해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6년 10월 28일 사석리 사호정(沙湖亭)에서 서거하였다. 묘소는 전북 순창군 구림면 구이산(龜夷山)에 조성되었다. 1928년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된 것을 시작으로, 능주의 고강서원(高崗書院), 순창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곡성의 무산서원(武山書院), 장성의 서림서원(書林書院), 무안의 평산사(平山祠), 죽림사(竹林祠), 화순의 구암사(龜岩祠)에 배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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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북도 순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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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당 평산사 전라남도 무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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