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雲門面) 신원동(新院洞)에서 김진효(金鎭孝)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도군 운문에서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관차 상경했다가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鐘泰) 등이 마을 청년들과 유지들에게 서울에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3월 10일부터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먼저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격문을 20여 매 작성하여 3월 15일 밤에 장터와 인근 마을 각처에 붙이면서 만세운동 계획을 준비해 갔다.
그러던 중 3월 18일에 주동인물의 일부가 일경에 붙잡히는 상황에서, 윤병림 등은 만세시위를 당일에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운문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면장의 집으로 향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20일 대구의 일본군 헌병대가 출동하면서 해산되고 중심 인물들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438·144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