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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218
성명
한자 金日準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독립운동(獨立運動) 동지(同志)사망(死亡)하여 그를 추모(追慕)하는 비문(碑文)으로 (因)하여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으로 징역 1년형(年刑)을 그리고 다시 독립운동(獨立運動) (爲)활동(活動)을 하다가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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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동향인 한영섭(韓永燮)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감시에 쫓겨 귀국한 다음 청소년과 문맹자를 모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경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한영섭의 병사(病死)를 추모하고 그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하여 향리에 추모비를 세워 그 비문에 「차디찬 흰빛 밑에 눌리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뿌린 동지였다」라고 썼다가 독립사상을 가졌다고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31년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출옥 후에 향리에서 다시 사학(私學)을 열어 주민들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유사시에 봉기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함경북도 나진(羅津)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붙잡혀 압송된 후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31. 12. 8 대구복심법원)
  • 형사사건부(목포법원지청형사분국)
  • 본적지범죄인명부 587면
  • 판결확정증명원(1977. 4. 21 부산지방검찰청)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일준 호: 훈재(薰齋) 제주(濟州) 광주학생운동, 학생전위동맹사건,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 사건
본문
1911년 4월 7일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1935년 이후 조천면朝天面) 함덕리(咸德里)에서 김완경(金完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훈재(薰齋)이다. 1927년 3월 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농학교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 1928년 10월 중동학교를 중퇴하였다. 1930년 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에서 신문 배달 등을 하다가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이에 공감하여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 해 11월경에 귀국하였다.1931년 1월 동향 출신이자 도쿄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병사한 한영섭(韓永燮)의 장례식을 향리에서 주도하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불평등한 사회를 파괴하고 무산계급의 자유 건설을 하고자 한 군(君)은 죽었으나, 군의 주의 사상은 동지인 우리들이 계승하여 분투할 것이니 안심하라”는 등의 사회주의와 항일정신을 강조한 내용의 만장(輓章)을 게양하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장례를 치렀다. 또한 동지들로부터 돈을 갹출하여 한영섭의 항일운동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이러한 사실이 탄로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1931년 8월 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항소하여, 같은 해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아 풀려났다.풀려난 후 귀향하여 1932년 3월 신좌 소비조합 함덕지점을 개설하고 소비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제주도 항일운동 지도자들과 수차례 모임을 갖고, 기존의 ‘제주도 야체이카’와 같은 전위 조직 건설의 운동 노선을 비판하고 농민 중심의 하부 조직을 건설하여 상부 조직을 도모할 것을 합의하고,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이하 ‘혁농위’)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는 제주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일환이었다.1932년 10월 부병훈(夫秉勳)·김경봉(金京奉)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조직간담회를 개최하여 구체적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 준비 작업으로 1933년 1월 10일 회원 120여 명으로 신좌 소비조합 함덕지부와 함덕청년회를 해체하고 대신 산업조합을 만들었다. 같은 달 28일 부병훈, 김경봉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책임자와 지역 책임자를 선정하였는데, 신좌면과 구좌면의 지역 책임자가 되었다.1933년 2월 하순 신좌면 출신 부병준(夫炳準)·부생종(夫生鍾)·김원근(金元根) 등과 제주도 혁농위의 산하조직으로서 신좌면[조천면] 혁농위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중순 부생종, 김원근과 신좌면 혁농위의 산하단체로서 함덕리 혁명적 농민조합협의회를 결성하고 부서와 책임 그리고 운동방침을 결정하였다. 또한 신좌면과 구좌면 각지에 일제가 농촌진흥사업의 일환으로 조직한 합법적 민간단체인 향동회(鄕同會) 및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 등에 들어가 동지를 규합하거나 항일 단체로 만들어 투쟁 역량 강화를 추진하였다. 같은 해 7월 부생종·김원근과 모여서 함덕리 산업조합 사업의 일환으로 해안에 등대를 설치하여 야간 항해의 편의를 도모하고 어민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1934년 4월 김원근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주민들을 교육하고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제주 혁농위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그러나 그 해 10월 경 조직이 탄로나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함북 나진(羅津)으로 피신했으나 붙잡혔다.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 대구복심법원형사제1부 1931-12-0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 미결구류일수 중 700일 본형에 산입 광주지방법원목포지청형사부 1937-04-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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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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