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4월 양평에서 기독교 장로인 한덕리(韓悳履), 신도 이용준(李容俊)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 양평군 고읍면(古邑面)에서 동지 최대현(崔大鉉)·윤기영(尹璣榮)·이보원(李輔元)과 함께 강상(江上)·강하(江下)·양서(楊西)·고읍 등 각 면(面)에서 모인 약 4,000명의 주민들 속에 뛰어들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군중 가운데 양근읍(楊根邑)으로 가서 시위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최대현이 “읍내로 가야 한다”고 제창하여, 군중을 이끌고 읍내를 향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여 서울로 도피하였다. 같은 해 10월 5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 위반’ 등으로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1927년 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칙령(勅令) 제11호에 의거하여 사면(赦免)되었다.
한편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신우균은 1920년 5월 초순경 비밀리에 양평으로 돌아왔다. 동지 한덕리를 만나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현상(現狀),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과 전망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임시정부의 여운형(呂運亨) 밑에 있는 재무관(財務官) 여중현(呂仲鉉)·박성명(朴聖明) 등의 참모로 활동하고 있는데 경기도 동부(東部) 지방이 아직 조직화되어 있지 않아서, 한덕리를 대한독립단 경기도지단장(京畿道支團長)으로 임명해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한다고 설명하였다. 한덕리가 이를 수락하자, 이후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서 독립단의 인장(印章) 2개·『독립신문』 등의 문서·지단장 임명장·등사판 등을 가지고 와서 한덕리에게 건네주는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10. 5)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6. 9)
-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6. 9)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498~50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권 1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