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479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閔貴得
이명 閔明在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7 훈격 건국포장
1919년 3월 23일 밤 서울 종로(鍾路)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다수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음.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자 서울의 각 지역에서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평화적인 한국인들의 독립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과 구금 및 고문이 이어졌으며, 시내 전역에 대한 주도면밀한 경계태세는 시위 움직임을 억눌렀다. 이에 따라 3월 1일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군중시위와 3월 5일 학생단 시위와 같은 수만 또는 수십만의 대규모 시위는 계속되지 않았다.

3월 12일 보신각 앞에서 「애원서」라는 이름의 제2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던 것은 이런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낭독자 문일평을 비롯하여 안동교회 목사 김백원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백관형 등 유림계 인사들이 꺼져가는 시위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민귀득은 1919년 3월 23일 밤 9시경 연지동(蓮池洞)의 동명탕(東明蕩)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종로 오교(午橋) 부근에서 5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민귀득은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상고했다. 1919년 9월 20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2월 21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5. 8)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19. 7. 12)
  • 판결문(고등법원:1919. 9. 20)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1992) 별집 제3집 422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9권 5~12면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민귀득 민명재(閔明在) 서울 서울 종로 만세시위
본문
1893년 12월 25일 서울 광희정(光熙町) 2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민명재(閔明在)를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 나이는 27세였으며, 직물공장 직공(織工)으로 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서울 종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이후 서울 각 지역에서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3월 5일에는 오전 8시부터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있었다. 3월 1일의 시위를 잇는 제2차 시위운동이었다. 이후 상인·노동자·행상인·일반인 등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일제는 서울 전역에 경찰과 헌병 등 무력을 집중 투입하여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시위 움직임을 감시하였으며 체포와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에 시위운동이 점차 소강상태를 맞게 되자 3월 12일 종로의 보신각 앞에서 문일평(文一平), 목사 차상진(車相晉), 유림 류준근(柳濬根) 등이 「12인 등의 장서」, 일명 애원서(哀願書)를 낭독하며 제2의 독립선언을 시도하기도 하였다.서울의 만세시위는 3월 22일 오전 9시 30분경 봉래동(蓬萊洞) 방면에서 노동자 400명과 일반 군중이 합한 약 700명이 시위를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어 다시 활발해졌다. 3월 23일에는 오후 8시경부터 자정까지 종로·돈화문·나무시장·수은동(授恩洞)·연건동(蓮建洞)·숭의동(崇義洞)·원효로·동대문 등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종로에서는 2~30명에서 3~500명, 또는 1천 명에 이르는 시위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전차에 투석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3월 23일 오후 9시경 종로 5정목(현 종로구 종로5가)에 위치한 동명탕(東明蕩)에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종로 근처 도로에서 다수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이에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가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일제에 붙잡혔다.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항소를 제기하였다. 같은 해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부분 취소하고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다시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正義), 인도(人道)에 따른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며 1심과 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하고 복종할 수 없는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21일 출옥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0월 경성지방법원 1919-05-0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원판결중피고에관한부분취소, 징역 6월 경성복심법원 1919-07-1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20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소요, 보안법위반 6월 경성복심법원 1919-09-20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민귀득(관리번호:31479)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