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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8
성명
한자 金敎善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 1919년 3.1운동 당시 천안 병천시장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체포되어 1919년 9월 19일 고등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3.1운동 비사 p899) (공주법원 1919.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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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919년 3월 홍일선(洪鎰善)과 함께 4월 1일의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川)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3월 29일 인근 부락에 살고 있는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 독립만세시위 거사의 취지를 역설하여 찬동을 얻었다.

4월 1일 홍일선·한동규·이순구와 함께 아우내 장터에 나가 장터의 출입구에서 장꾼들에게 독립만세시위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아우내 장터에서 별도 대열인 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이 주동한 시위군중과 합쳐져서 약 3천여명의 큰 무리가 이루어졌는데,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군중 3,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운동의 열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기승(氣勝)한 시위대열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에 접근하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기세에 놀라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들까지 가세하여 총검을 마구 휘둘러대며 발포를 계속하니,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벌어졌다.

오후 4시경 순국자의 가족과 시위군중이 일본 군경의 발포로 순국한 시체를 헌병주재소에 운반해 놓고 「순국자를 살려내라」고 항의하고 있을 때, 그는 한동규·이순구·이백하(李柏夏) 등과 함께 1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입구에 버티고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20·12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60·116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교선 - 충청남도 천안(天安) 병천면 만세시위
본문
1892년 6월 6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수신면(修身面) 발산리(鉢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28세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순구(李旬求)와 함께 고종 장례식 참여를 위해 3월 1일에 상경하였다가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왔다. 3월 말 홍일선(洪鎰善)이 찾아와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니 동참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마을의 유지인 박영학(朴永學), 수창리에 거주하는 한동규, 성남면의 이백하 등에게 동참할 것으로 권유하여 수락을 받았다. 3월 30일 저녁에 박영학·이순구·한동규 등과 함께 발산리 마을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다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소리에 주민들이 호응하여 횃불을 지피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또한, 마을을 돌면서 주민들을 직접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들과 함께 새벽까지 횃불을 올리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 시위가 끝난 후, 복다회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상훈(金相勳)을 찾아가 다시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협의하였다. 김상훈은 유중권과 조인원이 주도하는 용두리의 만세 운동과 합류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다음날인 3월 31일 오후, 발산리 마을 주민들과 횃불로 신호를 받은 이웃 마을의 주민들이 발산리의 뒷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이때 마침 병천의 만세 운동을 계획하던 연락원을 통해 병천 장날인 4월 1일로 계획된 병천 장터 만세 운동에 동참하자는 소식이 들어왔다. 3월 31일 저녁부터 글씨를 꽤 쓴다고 알려진 주민 10명과 함께 밤을 새워 만세 운동에 사용할 격문 수백 장을 작성하였다. 다음 날 이 격문을 길목에서 배포하였고, 거사가 계획된 병천장에 가는 사람들에게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피력하였다.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명의 주민이 모였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점에 홍일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등과 함께 이미 계획한 대로 아우내 장터 입구에 섰다. 오후 1시에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었다. 이때 조인원·유중권 이소제 부부·김상헌·김주헌·김상철 등과 함께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헌병이 장터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주재소 안으로 철수하자 주재소 뒤로 돌아가 천안으로 연락하는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조병호는 주재소 앞까지 압박해 들어가 주재소 안에서 총을 들고 밖을 내다보던 헌병 야마모토(山本)의 뺨을 때렸다. 조인원은 격분한 주민들을 향해 살생하지 말 것을 외쳤으나,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조인원을 포함한 시위 군중이 쓰러졌다. 오후 2시경 일본군이 헌병에 합류하여 시위 군중을 향해 사격을 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발포 당시 대부분의 주도자가 붙잡혔으나, 다행스럽게도 피신하여 4월 7일까지 버텼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피해받는 사실을 더 이상 관망할 수 없어, 자수를 선택하였다. 1919년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같은 해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기각되자 상고하였다.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징역 2년 공주지방법원 1919-05-2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원판결취소, 징역 2년, 소요공소사실은 무죄 경성복심법원 1919-07-04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1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천안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충청남도 천안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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