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919년 3월 홍일선(洪鎰善)과 함께 4월 1일의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川)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3월 29일 인근 부락에 살고 있는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 독립만세시위 거사의 취지를 역설하여 찬동을 얻었다.
4월 1일 홍일선·한동규·이순구와 함께 아우내 장터에 나가 장터의 출입구에서 장꾼들에게 독립만세시위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아우내 장터에서 별도 대열인 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이 주동한 시위군중과 합쳐져서 약 3천여명의 큰 무리가 이루어졌는데,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군중 3,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운동의 열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기승(氣勝)한 시위대열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에 접근하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기세에 놀라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들까지 가세하여 총검을 마구 휘둘러대며 발포를 계속하니,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벌어졌다.
오후 4시경 순국자의 가족과 시위군중이 일본 군경의 발포로 순국한 시체를 헌병주재소에 운반해 놓고 「순국자를 살려내라」고 항의하고 있을 때, 그는 한동규·이순구·이백하(李柏夏) 등과 함께 1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입구에 버티고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20·12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60·11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