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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58
성명
한자 申洪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6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33인중의 1(人)으로 2년 징역형(懲役刑)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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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公州)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그는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동지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협의하고, 이인환·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仁川)·원주(原州)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1·76·35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6·97·103·147·14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5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66·56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18·20·28·39·41·44·46·50·51면
  • 고등경찰요사 18·2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홍식 홍식(弘植), 호 : 동오(東吾) 충북 청주 3.1독립만세사건, 흥업구락부사건
본문
1872년 3월 1일 충북 청주군 문의면(文義面)  문산리(文山里) 25번지에서 아버지 기우(驥雨)와 어머니 경주 최씨 살랍(撒拉) 사이의 차남(서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동오(東吾), 초명은 홍식(弘植)이다. 전통 유교 선비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조부 용휴(用休, 1811~1890)는 18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75년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제수되었고 1882년 돈령부 부호군(副護軍),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태극도와 사물예도, 유선악보, 동국의복고증 등 저술을 남겼다. 한학을 공부하여 13세 때 시율을 지을 정도가 되었고 16세 때 사서삼경에 능통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14세 때(1886년) 아버지를 여의고 한 때 방황하다가 1891년 전주 이씨와 결혼한 후 마음을 잡고 과거시험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동학농민운동 이후 사회 ·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출세’의 기회가 소멸되자 불안과 불만에 사로잡혀 ‘약주창기(藥酒娼妓)’의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결국 가정불화로 이씨 부인과 이혼하고 1901년 6월 청주군 남일면 김해 김씨 원백(元伯)의 딸 이백가(利百加)와 재혼했다(‘이백가’는 후에 기독교 세례를 받으면서 얻은 이름 ‘리브가’의 한자 음역이다). 슬하에 2남(大浩, 昌浩) 3녀(愛羅, 翰羅, 世羅)를 두었다. 재혼 후에도 한 동안 정신적 방황을 계속하였던 그는 1904년 청주읍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할 생각에서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성경을 읽는 중에 ‘참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6년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W.C. Swearer)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직후 보은구역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1909년 직산구역, 1912년 입장 및 목천구역, 1913년 직산 및 진천구역을 담임하였다. 1913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4년 연기구역 담임자가 되었다. 1915년 1월 아산 구미동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성령체험을 하였고 이후 공주동지방 순행목사로 사역하다가 1916년 공주읍교회를 거쳐 1917년 6월부터 평양 남산현교회을 담임하던 중 그곳에서 3 · 1운동을 맞았다. 평양 3 · 1운동은 1919년 2월 초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선우혁이 평양을 방문해서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와 예수교서원 총무 안세환을 만나 파리강화회담 소식을 전한 것으로 시작해서 2월 15일 경, 이승훈이 서울로 올라가던 중 평양에 들러 기홀병원에 위장 입원하고 평양지역 장로교와 감리교 지도자들과 접촉함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승훈은 장로교 대표로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를 만났고 감리교 대표로 그 무렵 평양에 내려와 있던 손정도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로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는 별도로 의친왕 망명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으로 갈 계획이 있어 참여하기 어렵다며 대신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를 소개했다. 이에 기홀병원에서 이승훈을 만난 그는 그동안 선천과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뜻을 정했다. 2월 19일 서울로 올라온 그는 2월 20일 저녁 수창동 박희도 집에서 이승훈과 정춘수, 오화영, 오기선 등과 만나 천도교와 합작문제, 운동방법론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2월 21일 그동안 별개로 진행되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의 연합모임이 이루어져 오후 2시 함태영 집에서 신홍식과 오기선, 박희도, 현순, 오화영(이상 감리교), 이승훈과 이갑성, 안세환, 오상근, 함태영(이상 장로교) 등이 회합하였고 그 날 저녁 7시에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이갑성 사택에서 현순, 오화영, 오기선, 김세환, 이승훈,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등과 회합하였다. 2월 21일의 두 차례 기독교 대표자들 모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운동방법론과 역할 분담이 논의되었는데 그는 평양과 평남지역 지지세력 확보책임을 맡았다. 사흘간의 서울 회합을 마치고 2월 22일 평양에 귀환한 뒤 동지를 포섭하고 평양지역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우선 자신이 담임하는 남산현교회 부담임 박석훈 목사를 비롯하여 이향리교회 김찬흥 목사와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박구리교회 송득후 목사, 그리고 숭의여학교 교사 박현숙, 광성고등보통학교 교사 홍환섭, 평양유치원 교사 한국보와 김연실 등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제작 등 평양지역 감리교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 서울을 다녀온 안세환을 통해 독립선언식이 3월 1일로 확정된 사실을 비롯하여 그동안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식 준비상황을 전달받고 중화읍교회 이창주 전도사를 통해 『독립선언서』에 날인할 도장을 서울의 박희도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길선주 목사와 안세환, 윤원삼, 강규찬, 이덕환 등 장로교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며 평양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는데 서울과 같은 3월 1일 오후 1시에 거사하되 장로교회는 관후리 숭덕학교, 감리교회는 수옥리 남산현교회에서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평양 시내에서 합류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한편 그는 평양 외에 다른 지역 만세운동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월 25일 평양에서 남산현교회 출신으로 진남포교회 삼숭학교 교장으로 있던 홍기황을 만나 진남포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고 그 결과 3월 1일 진남포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1916년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2월 21일 서울 회합에 참석하여 전북지역 책임자로 선정된 『기독신보』 주필 김필수 목사에게 공주읍교회 현석칠 목사와 오익표 전도사, 공주 영명학교 교사 김수철과 김관회, 김사현, 이규상 등을 소개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김필수 목사는 전주로 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를 전하게 하였고 그 결과 3월 7일 공주 앵산공원 만세시위와 4월 1일 공주 장날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평양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준비를 마친 뒤 2월 28일 새벽 서울에서 열릴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 편으로 평양을 떠나 그 날 아침 서울에 도착, 정동교회에서 같은 ‘미감리회 소속 목회자’들로 민족대표로 참여한 박희도와 이필주, 최성모 등과 회합하였고 그 날 저녁 7시 재동 손병희 집에서 모인 민족대표자 회합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결정된 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변경된 거사장소, 태화관(명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고 곧바로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경무총감부에 연행되었다. 그 시각 평양에서도 예정대로 그가 시무하던 남산현교회에서 고종황제 봉도식을 겸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고 선언식을 마친 교인들이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담임인 신홍식 목사 대신 평양 만세운동을 지휘했던 박석훈 목사는 시위 직후 경찰에 연행되었고 옥중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앓다가 결국 1919년 11월 15일 ‘옥중 순국’하였다. 3월 1일 서울 경무총감부에 연행된 후 이루어진 경찰과 검찰, 판사 신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기와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1920년 10월 12일 경성복심법원 공판에서 2년 구형을 받고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구형대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았다. 이후 미결수로 있던 기간까지 포함하여 2년 8개월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11월 4일 마포 경성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그가 서울에서 투옥생활을 하는 동안 평양 남산현교회 교인들은 여전히 그의 가족을 목사 사택에 머물게 하고 생활비를 대 주었다. 이후 평양에서 3개월 요양한 후 1922년 2월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어 목회에 복귀하였으며 이후 1927년 강릉지방과 원주지방 감리사, 1929년 원주구역 담임 및 원주지방 감리사로 사역하였고 1930~34년 감리교 총리원 이사, 1933년 감리교신학교 이사, 1934년 『기독신보』 이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기독교청년회(YMCA)와 엡웟청년회와 같은 기독교 청년운동 단체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개량적 민족주의 노선의 사회운동인 절제운동과 농촌운동, 야학운동, 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5년 4월 건강을 이유로 자원 은퇴한 후 원주에 잠시 머물다가 1937년 고향 청주로 낙향하여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 173번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요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낙향한 지 1년 만인 1938년 여름 서울에서 흥업구락부사건이 터졌을 때 병약한 몸으로 청주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는 1925년 인천 내리교회를 담임하던 시절, 당시 서울 기독교청년회 총무였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운동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1927년 강원도로 임지를 옮긴 후에는 흥업구락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지만 1938년 5월 신흥우와 윤치영, 구자옥, 이만규, 홍병선, 유억겸 등 흥업구락부 지도부가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흥업구락부 회원 명단이 발견되고 거기 이름을 올린 과거 회원들까지 연행, 조사할 때 고향에서 요양 중이던 신홍식도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것이다. 비록 불기소 처분을 받아 구속은 면했지만 신홍식으로서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겪은 시련이었다. 신홍식은 흥업구락부사건 이후 한층 엄중해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39년 3월 18일 인차리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인차리 선산에 조성되었다. 인천 내리교회 담임 시절인 1923년 내리교회 역사를 정리한 『인천내리교회역사仁川內里敎會 歷史』를 저술하였고, 1929년 자신의 개종체험과 신앙, 민족계몽운동 방략을 담은 자전적 소설 『장수옹(長壽翁)』(조선예수교서회 발행)을 출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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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2년(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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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북도 청원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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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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