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선천읍내에서의 만세시위는 신성중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병간은 신성중학교 4학년생으로 2월 27일 동창 3명과 함께 김지웅 선생에게 초대받았다. 여기서 도쿄(東京) 재류조선인학생(在留朝鮮人學生) 등이 저작 출판한 「조선독립선언서」, 1월 28일 게재한 『매일신보』 번역문 및 베이징(北京) 영자신문 번역문을 등사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조선독립선언서」 및 태극기 약 500매씩을 등사하였다. 3월 1일 학교에서 홍성익(洪盛益) 선생은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종이 위에 ‘조선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 오후 1시 신성중학교 학생 150여 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아갔다. 천만동 시장에 이르자 시위군중은 1,000여 명이 넘었다. 신성중학교 교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바로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먼저 군청과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시가를 돌았다. 1시간쯤 후 선천수비대가 기마경찰대와 함께 출동하여 행진을 저지하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극력 저항하자 일본군은 발포를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시위대열은 아수라장이 되고 태극기를 든 기수가 총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일본군은 시위현장에서 50~60명을 체포하고 신성중학교 기숙사와 학교 교직원 사택 등을 수색하여 가담자들을 추가 체포하였다.
고병간은 선천의 3월 1일 만세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등사하고 당일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여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7. 12)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9권 234, 236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255~25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