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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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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高秉幹
이명 고병관, 高平幹康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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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8 훈격 애족장
1919년 2월 27일 평북(平北) 선천군(宣川郡)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4학년 재학 중 동교(同校) 김지웅(金志熊) 선생(先生)동창(同窓) 3(人)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태극기(太極旗) 등을 약 500매씩 등사하고 같은해 3월 1일 동 (郡)의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태극기(太極旗)를 배부하고 시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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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선천읍내에서의 만세시위는 신성중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병간은 신성중학교 4학년생으로 2월 27일 동창 3명과 함께 김지웅 선생에게 초대받았다. 여기서 도쿄(東京) 재류조선인학생(在留朝鮮人學生) 등이 저작 출판한 「조선독립선언서」, 1월 28일 게재한 『매일신보』 번역문 및 베이징(北京) 영자신문 번역문을 등사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조선독립선언서」 및 태극기 약 500매씩을 등사하였다. 3월 1일 학교에서 홍성익(洪盛益) 선생은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종이 위에 ‘조선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 오후 1시 신성중학교 학생 150여 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아갔다. 천만동 시장에 이르자 시위군중은 1,000여 명이 넘었다. 신성중학교 교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바로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먼저 군청과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시가를 돌았다. 1시간쯤 후 선천수비대가 기마경찰대와 함께 출동하여 행진을 저지하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극력 저항하자 일본군은 발포를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시위대열은 아수라장이 되고 태극기를 든 기수가 총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일본군은 시위현장에서 50~60명을 체포하고 신성중학교 기숙사와 학교 교직원 사택 등을 수색하여 가담자들을 추가 체포하였다.

고병간은 선천의 3월 1일 만세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등사하고 당일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여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7. 12)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9권 234, 236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255~25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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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병간 호 : 영서(瀛西), 이명 : 고병관·고평간강(高平幹康) 평북 의주(義州) 선천면 만세시위
본문
1899년 12월 24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마룡동(麻龍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서(瀛西)이다. 이명은 고평간강(高平幹康)·고병관을 사용하였다. 의주 신영소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북 선천(宣川)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입학하였다. 기독교 계열인 신성학교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교였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선천면의 만세 시위는 신성학교 학생 및 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신성학교 교사 홍성익(洪盛益)은 학교 근처 남교회 목사 김석창(金錫昌)과 같은 학교 교사 김지웅(金志雄) 및 양준명(梁濬明) 등과 논의하여 선천군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27일 저녁 장일현(張日炫)·박찬빈(朴賛彬)·김봉성(金鳳性) 등과 함께 김지웅 교사를 만나 만세 시위의 취지를 설명 듣고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다. 이후 학교 기숙사인 캐롤린홀 4층 지붕 아래 밀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2·8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500여 매를 만들었다. ‘대호! 한국 청년’이라고 쓴 대형 깃발도 제작하였다. 한편, 홍성익·김석창·양준명 등은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거사 당일 정오 기도회 시간에 집회실에 전교생들과 함께 모였다. 그때 홍성익이 교단에 등장하여 혈서로 ‘한국독립’을 크게 쓰면서 만세 시위에 나설 것을 주창하였다. 그 즉시 전교생 및 교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오후 2시 종소리를 신호로 교문을 뛰쳐나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인근 보성여학교 학생들도 태극기를 들고 합세하였다. 남교회 앞을 지나 북교회를 거쳐 거리로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중이 계속해서 몰려들어, 천남동시장에 이르렀을 때 1,000여 명에 달하였다. 김지웅 교사가 군중 한가운데서 전날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형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 행진을 이끌고 군청,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시간쯤 지나 일본군 선천수비대가 기마경찰대와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충돌이 일어났고, 일본군은 즉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는 흩어졌고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1919년 6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같은 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상고 취지에서 “한국 민족으로서 생존 존영을 얻으려면 독립 밖에는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옥 후 신성학교에 복학하였고 192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외과교수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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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7-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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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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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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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독립유공자 추모비 서울특별시 동작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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