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기대가 국내외로 증폭되자, 그해 9월경 경북 영천(永川)역 부근에서 권태일(權泰鎰)과 만나 독립쟁취를 위한 방법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국내에서의 무장투쟁과 상해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위한 군자금 모금을 행하기로 결정하고,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 등을 허병율(許秉律)·조선규(趙善奎) 등 부호 앞으로 발송하고 대구(大邱) 시내에 경고문을 살포하였다. 이들은 한편 일제관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대구 남문(南門) 시장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일경에 발각되기도 하였다. 그후 1920년 10월 그는 오기수(吳麒洙)·권태일 등과 군자금을 모집하여 허병율로 하여금 8천원을 상해 임정으로 송금토록 하였으며, 조선규를 설득하여 독립운동조직에 가담시키고 군자금을 헌납케 하였다. 1921년 1월 하순경 대구에서 동지인 권충락(權忠洛)과 만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달성(達城)의 부호인 최재교(崔在敎)를 협박하여 3만원의 헌납을 요구하고 그중 일부를 수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러나 1922년 5월 27일에 경북지방에서 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동년 12월 22일에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2. 12. 22 대구지방법원)
- 고등경찰요사 210·269·270·273·27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747·74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