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3년
3. 1925년
4. 1927년
5. 1929년
6. 1930년
7. 1931~1945년까지
8. 1932년
9. 1933년
10. 1934년
11. 1935년
12. 1938년
13. 1940년~1945년
14. 1941년
15. 1935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 가 천도교 대표부에서 일하면서 "독립신문사"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후 남경(南京)으로 옮겨 가 학업을 계속하다가, 1925년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1926년에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1927년 김규식(金奎植)·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대표 겸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1933년 1월 상해에서 이유필·김동우·안경근·박창세 등과 한국독립당대회(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하여 이사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동년 6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의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934년 1월 2일의 제26회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광복시까지 조국광복을 위한 의정활동을 계속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독립당의 남경지부(南京支部) 책임자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듬해 여름 남경에서 각 단체의 사상과 주의를 초월한 독립전선을 구성하려는 목적 하에 양기탁·유동열·이청천·현익철·최동오 등이 모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키로 결정하게 되자 그는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에 기관지로 월간 「민족혁명」과 주간 「우리 길」을 발행하여 민족사상고취에 앞장섰다.
1937년 2월 이청천·현익철·유동열·양기탁·최동오·이복원 등과 합의하여 김원봉 등의 적색분자를 제거하는 청당 운동을 일으켜 민족혁명당을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하자 김원봉 등 반대세력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명명함으로써 당이 양분되었다. 동년 7월 북경 교외 노하구에서 중국과 일본의 충돌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항주(杭州)의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의 3개정당과 미주(美洲) 등에 산재한 대한인독립단, 동지회, 국민회, 애국부인회, 단합회, 애국단 등의 6개 단체대표들이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0년에는 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1945년 8월에는 조선혁명당 간부로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이에 대처키 위하여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간부들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결성하여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9 361 362 366 370 37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02 515 537 602 603 646 671 70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611·810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68 823 825 828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24 225 226 227 229 230 231 234 237 243 244 258 259 269 270 274 275·276 278 281·282 283 291 292 294 413 414 455 539 549 554 558 571 573 574 590 591 600 610 611 626 628 629 633 636 672 673 678 688 690 691 692 705 706 73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79 670 715 7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