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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89
성명
한자 金冠五
이명 金官五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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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919년 3.1운동참가, 피체, 석방 후 망명

2. 1924년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43(軍)중앙훈련단(中央訓練團)에서 보병학교(步兵學校) 고등군사반(高等軍事班) 수료(修了)

3. 1941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경구당(重慶區黨) 부위원장(部委員長)(당원증 현존)

4. 1941년 광복군(光復軍) 사령부(司令部) 고등부관(高等副官)(임명장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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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보성중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물을 비밀리에 배부하다가 같은 해 3월 23일 체포되어 고통을 당했다. 1921년 상해로 망명한 그는 운남(雲南) 강무당(講武堂)에서 이준식(李俊植) 등 10여 명과 함께 훈련을 받고 1924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광주(廣州)로 가서 중국의 국민혁명군 제43군 및 중앙훈련단에서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였다.

1941년에는 한국독립당 중경지구 위원장에 취임하는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부관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부 경위대 대장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는 1939년 12월 3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1942년 6월 그를 비롯한 14명의 선전위원이 선임되어 대내외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그리고 1945년 6월에는 광복군 참모처 제2과장에 임명되었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훈련 담당 간부로 주항지대장(駐杭支隊長)에 임명되어 광복군 사병 훈련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8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0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95면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권 3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68, 930, 9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3, 313, 54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15, 178, 269, 470, 51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75, 290, 586, 587, 588, 599, 602, 603, 604, 605, 606, 607, 608, 609, 634, 636, 638, 689, 691, 698, 702, 768, 77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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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관오 호 : 우당(愚堂), 이명 : 김관오(金官五) 서울 -
본문
1901년 3월 4일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우당(愚堂)이고, 이명은 김관오(金官五)이다. 1919년 보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여 선전 문건을 배부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경성지방검사국으로 이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10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1922년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교하였다. 1924년 윈난강무학교 졸업 후에는 광저우(廣州) 주둔 국민혁명군 제4로군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중국군 중앙훈련단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였다. 1940년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소(對蘇) 외교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방순희(方順熙, 1963년 독립장)와 혼인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한국독립당 당원이자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함께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25일 개회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고, 이와 함께 한국독립당 중경지부 위원장·광복군총사령부 고급부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28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이연호·심광식·이상만·최동오·엄항섭·안훈·조시원·이복원·유동열·유자명·방순희·박건웅·신환·이정호 의원과 연명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의 취소를 요구하는 제의안을 제출하였다. 이 제의안에서 ‘9개 준승’을 중국이 유럽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시발이 되는 난징조약(南京條約) 이상의 위험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만대의 치욕을 가하는 동시에, 폭력으로써 폭력을 갚는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우매한 행동이라고 지적하였다. 1943년 개편된 ‘광복군총사령부 직제’에 따라 고급참모에 임명되었고, 1944년 12월 9일 공포된 ‘총사령부 잠행조직 조례’에 의하면, 계급은 정령(正領)이었고 참모처 제2과장직을 맡았다. 1945년 8월 광복 후에는 광복군 주항지대장(駐杭支隊長)에 임명되어, 권준(權晙)·김학규(金學奎)·박시창(朴始昌)·최용덕(崔用德) 등과 중국군 및 일본군에 소속돼 있던 한인 사병을 광복군에 편입, 훈련시켰다. 1946년 4월 26일 미군 LST편으로 광복군 2지대원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라,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콜레라가 발생하여 부산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에야 상륙 수속이 끝나 인천항으로 입국하였다. 가족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고 있던 충무로 2가 한미호텔(韓美莊)에 여장을 풀었다. 이후 국군에 입대하여, 6·25전쟁 시 사단장과 유격사령관을 역임하였으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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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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