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19 독립단 (獨立團) 조직하고자 동지 (同志) 은경옥 (殷慶玉) 등 8명과 독립운동을 함.
2. 1919. 3.충북 (忠北) 중원군 (中原郡) 기미년 (己未年) 대한독립만세의 주모자로 왜경 (倭警) 에 피체 (被逮) (한국독립운동사 (韓國獨立運動史) 172)
3.청주형무소 (淸州刑務所) 에 미결 (未決) 1년 6개월 후 3년형 언도 받고 복역 후 출감시 옥문 (獄門) 에서 재차 (再次) 독립만세 고창 (高唱) 으로 서대문형무소 (西大門刑務所) 에서 다시 2년을 복역 하고 합계 5년의 옥고 를 겪음(복역 (服役) 증명서 (證明書) ) 교도소장 (矯導所長) .
4. 1934. 4. 16왜경 (倭警) 의 학대 (虐待) 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자결 (自決)
<충북도지사 (忠北道知事) 표창 (表彰) 및 위문품 원여 (慰問品援與) 확인증 (確認證) >
<충북 중원군 (忠北中原郡) 신니면장 (薪尼面長) 확인서 (確認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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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9. 3.
3.
4. 193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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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충청북도 중원(中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동지들과 함께 이희갑(李喜甲)의 집에서, 이튿날 신니면(薪尼面) 용원(龍院)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단경옥(段慶玉)·이희갑·이강렴(李康濂) 등과 독립선언서를 제작, 등사하였다.
4월 1일 약 200여명의 군중이 모인 장터에서 그들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청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게 될 때 옥문에서 재차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재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출옥은 하였지만 일본 헌병·경찰 등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자, 1934년 4월 16일 독립만세를 외치고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0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