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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2710
성명
한자 徐相烈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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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895년 이필희(李弼熙), 신지수(申芝秀), 이범목(李範穆) 등과 같이 단양(丹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서, 호남7읍의 도의장 및 중군장으로 토산(兎山), 금천(金川) 등지에서 활동함.

2. 1896년 6월 영남 일대에서 예천회맹(醴泉會盟)을 조직하여 맹주가 되고 유인석 부대의 서행시 앞질러 랑천(狼川)에 이르러 적병과 교전중 전사함(항일순국의열사전 p.322, 기려수필(騎驢隨筆) p.41, 한국독립운동사 p.51 , 경비편책(警備編冊) 150, 폭도편책(暴徒編冊) 28(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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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장신(將臣) 문유(文裕)의 증손으로 인품이 강의 단결(剛毅端潔)하며 재주가 뛰어나서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뫼렌돌프(穆麟德)가 조정에 입사(入仕)하게 되자 통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판에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라고 하겠는가. 도대체 발을 붙일 땅이 어디인가" 하였다.

그때 영평(永平)의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이 학문이 깊고 덕이 높으며 바른 도를 지켜 동요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 날로 가서 뵈온바 공의 선(善)을 향하고 악을 등지는 천성으로서 더욱 화이(華夷)와 인수(人獸)에 대한 큰 판가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드디어 뜻을 높이 세워 가산을 방매하고 제천(堤川)의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계사년에 유성재가 사망하자 3년의 복상을 치렀다. 그간에 그의 학문이 높음을 알고 조정에서 선전관(宣伝官)을 제수하고 장차 통정(通政)의 계급에 올리어 세자(世子)의 사부로 초빙하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색하였으며 병석에 눕기까지 하였다.

1895년 고을의 군수 김익진(金益鎭)이 의복을 개혁시키고 머리를 깎게 하고자 핍박하였으나 죽음을 불사하고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여름 입암 주용규(立庵 朱庸奎)와 더불어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을 뵙고 춘추(春秋)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1895년 8월 19일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발하자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우선 선산(先山)에 이별을 고하러 길을 떠났으나 단발령이 발하여져 길이 막혀 늦게 되돌아왔다. 동문인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과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11월 28일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서상열은 이필희(李弼熙)·오인영(吳寅泳)·배시석(裴是碩)과 더불어 단양(丹陽)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제천으로 달려갔다. 동지들이 서상열을 대장으로 추대하려 하므로 이필희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참모가 되었다.

12월 8일 단양에 이르러 관군과 접전할 때 아군을 미리 복병시켜 두었다가 좌우에서 협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승세를 타서 충주부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장졸들이 재를 넘어서 영남 각지의 의진과 합세할 것을 주장하므로 죽령(竹嶺)을 넘어서 풍기(豊基) 고을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의병을 소모하고 영월(寧越)에 당도하니 안승우(安承禹)가 제천으로부터 영서로 돌다가 군대를 거느리고 회합했다.

또한 신지수(申芝秀)도 네 고을 병정을 모집하여 왔다. 다시 행군하여 제천에 이르러 친일관료인 권숙(權潚)·서상기(徐相蘷)를 베어 죽이고, 병졸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리하며, 갑옷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본진의 뒤를 따라 계속 전진하였다.

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된 유인석이 이미 충주성에 입성해 있으므로 서상열은 "서울 부근의 적은 반드시 엄한 방비가 있을 터이니 군사를 휴식하고 군량을 적취(積聚)하여 사방의 군사가 모여드는 것을 기다려서 진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이어서 영남 의병을 격동시켜 호응케 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상열은 원용정(元容正)과 더불어 재를 넘어 각읍 의병을 불러모으니 남방의 여러 장수들이 호응하여 예천(醴泉)군에 모여 공을 추대하여 맹주를 삼았다. 이때 회강(會剛, 榮川)·회복(會福, 安東) 등 7읍이 맹약에 참석하니 서상열은 원용정에게 맹약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첫째, 역적의 당이 되지 말 것. 둘째, 중화의 제도를 변하지 말 것. 셋째, 죽고 사는 것으로써 마음을 바꾸지 말 것. 넷째, 두 마음을 갖고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 것. 다섯째, 적을 보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 것."

3월 20일(음력) 맹세한 후 적에게 부하뇌동한 유인형(柳仁馨) 등 일곱 군수를 베고,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尙州)에 있는 왜군의 진지를 쳤다. 다른 의진은 구성이 부실하여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나, 서상열의 의진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예천으로 회군할 수 있었다.

이때 관찰사 이남규(李南奎)·이중하(李重夏)가 대구(大邱)·안동(安東)을 거점으로 의진을 집중 공격하여 왔다. 전세가 불리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제천으로 환군하였다. 다시 유인석의 명을 받고 단양으로 나아가 방비하고 있었다.

그 며칠 후 제천 의진이 무너지고 안승우·홍사구(洪思九)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분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풍기에 유진하였다가 영춘(永春)을 거쳐 정선(旌善)으로 나아가 유인석에게 황평양서(黃平兩西)로 진출하여 모군할 것을 고하였다. 도중에 여러 차례 적과 접전하였는데 6월 12일 낭천(狼川)에 이르러 적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처음부터 서상열의 시중을 들어오던 김선이(金仙伊)가 끝까지 적을 꾸짖으며 서상열을 비호하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28·41·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76·70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168·169·170·171·172·174·175·176·177·191·320·528·53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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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서상렬 자 : 경은(景殷, 敬殷), 호 : 경암(敬菴), 춘수당(春睡堂) 충북 제천 -
본문
1856년 2월 10일 충청북도 제천(堤川)에서 태어났다. 무반 집안 출신이며, 생부는 서진순(徐進淳)이며, 어려서 서제순(徐濟淳)에게 입양되었다. 입양될 무렵 조부는 일찍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벼슬을 얻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 가문이 기우는 상태였으므로 어머니 파평 윤씨의 엄격한 지도 아래 성장하였다.10대 시절에 서상익(徐相翊)의 집에서 다섯 살 아래의 조카뻘인 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永孝)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한때 무과에 나아가 급제하고 권력가 민태호(閔台鎬)의 집에 출입하였으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문객 생활을 그만두었다.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고위 관료에 임용되자 벼슬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28세에 충북 청풍(淸風, 현 제천)의 국사봉(國師峯) 아래에 있는 안간이(현 제천시 금성면 활산리) 마을에 정착하였다.1884년 같은 집안 출신의 서광범·서재필(徐載弼)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집안에서 ‘역적’이 나왔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고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출입하였다. 영평(永平, 현 포천 북부 지역)에서 강학하던 김평묵(金平默)을 찾아 배움을 청하였고, 뒷날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나아갔다.유중교가 제천(堤川)의 장담(長潭)으로 이주하여 강회를 시작하자 장담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후 유중교의 충실한 문도요, 후원자로서 처신하였다. 심학(心學)·실천윤리·예악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심을 보이며 학문에 몰두하였고, 여러 사우(士友)와 어울려 강론하는데 뛰어났으며, 초학자들을 지도하는데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에 집안의 주선으로 선전관(宣傳官) 벼슬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유중교가 사망한 후, 장담에서 스승이 남긴 ‘열흘마다 베푸는 강의와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춘·추의 강회(講會) 제도’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울러 이근원(李根元)·이소응(李昭應) 등 동문 선배들과 함께 스승의 문집인 『성재집(省齋集)』을 출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일본군의 경복궁 습격과 갑오개혁 소식을 전해 듣고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5년 여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며칠간 통곡하였다. 그 해 연말에 단발령이 내리자 지평의 선비인 이춘영(李春永), 포수대장인 김백선(金伯先)이 포군(砲軍)을 모아 원주의 안창(安昌,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서 봉기하고 제천으로 달려왔으며, 장담 선비인 이필희(李弼熙)와 안승우(安承禹) 등이 그들을 맞았다. 이 무렵 의병을 일으킬 것을 포천 선영에 고하고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장담 선비들이 힘을 보태면서 지평 의병부대는 ‘제천 의병부대’로 개편되었다. 무인 출신의 장담 선비인 이필희가 대장이 되었을 때, 군사(軍師)의 책임을 맡았다. 단양군수 권숙(權潚)을 찾아가 의진에 참여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였고, (음)12월 8일 단양의 장회 골짜기에서 벌어졌던 첫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의병부대가 내부 분열로 약화되자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맞아들여 재기하고자 하였다.1895년 (음)12월 24일 영월로 북상한 의병 지도부는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부대는 ‘호좌 의병부대’로 재출발했고, 곧장 제천으로 내려가서 사군 지역을 다시 장악하였다.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처단하여 기세를 올렸고, 충주성으로 나아가 관찰사를 처단하였다. 이때 영월에 남아 병력을 모으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호좌의병부대가 위기에 처하자 ‘소모토적대장(召募討賊大將)’의 직책을 받고 영남 쪽으로 이동하여 활로를 개척하였다. 영월을 출발하여 영천(榮川)·풍기(豐基)를 거치면서 병력을 모으고 영남의 유력 인사를 맞아들였다. 영남지역 의병부대와 연대하여 태봉(台封)을 공격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또한 의병에 협조적이지 않은 예천군수 등을 처단하였다.1896년 (음)2월 16일 태봉을 공략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4월 초 안동·예천에서 잇달아 패전하였다. 이 무렵 왕명을 내세우며 해산을 요구하는 경병(京兵)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았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고자 영남지역 활동을 마무리하고 북상하였다. (음)4월 13일 유인석 부대 본진과 합류하여 재기를 위해 인근 지역을 전전하면서 고투하였다.의병부대의 약화를 만회하고자 서북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건의하였다. 얼마 후 이동을 시작하였는데, (음)6월 13일 유인석이 이끄는 대장진에 앞장서서 길을 열다가 낭천(狼川, 현 강원도 화천)에서 전사하였다.저술로 『경암집(敬庵集)』이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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