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6·10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시위에 앞장섰다.
그후 미국에 유학하여 뉴저지주에 있는 장로교 종회소속 프린스톤대학 신학과에 들어가 1937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는 가는 곳마다 한국인 중심으로 애국단체인 동지회, 교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신문인 신한민보에 1942년 3·1절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개최된 전한인대회의 진행사항을 기고하여 미국민들과 항일의식의 공감대를 조성하였다.
1942년 3월말부터는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 이승만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구미위원 주보"의 편집 발송을 담당하여 임병직·장기영 등과 같이 근무하였다.
1943년 6월 뜻한 바 있어 미국 공군사관학교(O.C.S) 등에서 훈련을 받고 1944년 정월에 공군소위로 임관되었다. 1944년 5월 C.B.I(중국, 버마, 인도)전투구 항공대에 배속되어 일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5년 1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중국 곤명에 도착하여 미 제14항공대 소속 특수 중폭격기대대에 근무하던 중 중경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한미 합작 군사훈련을 위한 한국측 잠재세력을 조사 보고하라는 미 육군성 지시를 받았다. 여기서 미공군 소령 클라이드 비 사젠트(Clyde B.Sargent)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사젠트와 함께 한국임시정부요인 김 구·조소앙·엄항섭·신익희를 비롯하여 이청천·최용덕·김약산·김규식 등과 긴밀한 상의 끝에 양자강 건너 광복군제1지대와 서안에 있는 광복군제2지대를 각각 방문하고 정확한 실태를 조사하였다.
1945년 5월초에 서안에 도착하니 광복군 제2지대의 본부는 지대장 이범석과 안춘생·노태준 등이 부서를 맡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미국방성으로부터 미국 O.S.S(전략정보처) 산하에 한미합작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키라는 지시가 있어, 그는 이순용(李淳鎔)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여 주로 통신교육을 전담하였으며, 광복군의 국내진입 작전계획에 참여하였으나 조국의 광복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광복 후 그는 버드중령을 단장으로 미국군 장교 19명, 이범석·김준엽·노능서 등 도합 24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함께 C-26비행기를 타고 1945년 8월 17일 중국 서안을 떠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 C-16상공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시 서안(西安)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91·492·506·6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