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일본 동경의 조도전(早稻田) 대학 정치과 유학중, 1912년 10월 27일 조직된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의 간사부장·회장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도자로 참가하였다.
2 . 8독립선언 이후 귀국한 김명식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노동공제회는 당시 노동운동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1921년 3월 노동공제회 회장에 선출되면서 노동운동에 앞장을 섰다.
아울러 1920년 6월 28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朝鮮靑年會聯合期成會)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이어 12월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창립될 때, 그는 지방부의 일원으로 피선되었다.
그후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식민지 민족문제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월 신생활사(新生活社) 설립에 참가하여 주필 기자로 활동하였다. {신생활}은 1922년 3월 11일 창간된 사회주의 계열의 최초의 대중 잡지로, 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에 목적을 두고 발행되었다. {신생활}은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발매금지되었는데, 1922년 11월 14일자 특집의 '노국(露國)혁명 5주년기념호'가 다시 문제가 되어, 발매 금지가 되었다. 이때 「러시아혁명기념」이란 논문을 기재한 김명식도 체포되어 1923년 1월 8일,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후 고문후유증으로 1924년 7월 26일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되었으나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그는 1927년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의 제주지회장(濟州支會長)으로 활약하였으며, 1929년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되었다. 그 결과 그는 1930년 6월 7일 대판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이후에는 잡지 {비판}에 「조선종교론」·「민족단체 재건계획에 대하여」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第2卷 36·37·43·44·62·63·65∼67·74·103·104·106·109·136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9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19·12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2輯 58·214·218·221·222·232·238·241·244·250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495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7卷 478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1177∼1179面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68面
- 濟州抗日獨立運動史(濟州道) 47·54·57·95·96·111·112·173·174·200·212·269·309·321·347·366·367·439∼452·777·977·112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48·64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976·988·998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4·25·29·33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112·114·464·474·482·555面
- 每日申報(1921. 3. 15)
- 東亞日報(1920. 5. 7, 1922. 1. 19, 11. 25, 11. 26, 11. 27, 12. 5, 12. 28, 1923. 1. 9, 1. 17, 1927. 2. 9)
- 朝鮮日報(1930. 7. 5)
- 判決文(1923. 1. 16. 京城地方法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6卷 3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9卷 3·15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