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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600
성명
한자 金時殷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21∼24 까지 계속하여 제주도(濟州島) 신좌면(新左面)을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시위 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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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제주도(당시 전남 관할) 신좌(新左)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신좌면 조천리(朝天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이곳의 유지 김시학(金時學)의 아들로서 서울 휘문학교(徽文學校)에 재학중이던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3월 15일 귀향하여 제주도내에서 이름높은 유학자이며 지사인 백부 김시우(金時宇)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상황을 소상하게 알림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는 김시범(金時範)·고재륜(高載崙)·김영배(金營培)·김연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찬용(金燦容)·백응선(白應善)·김운배(金云培)·박두규(朴斗奎)·이문천(李文千)·윤계진(尹桂珍)·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천리에서 약간 떨어진 『미밑동산』에 들어가 사생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산 이름도 『만세동산』이라고 고쳐 부르기로 하며 독립만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3월 21일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신촌(新村) 함덕리(咸德里) 등의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려주며 다 함께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그는 6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동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큰길로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이때 긴급출동한 수십명의 일본 무장병에 의해 제지당하고, 주동자 12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구속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저녁 무렵때까지 행진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어 3월 24일 조천리 장날을 맞이하여 다시 수많은 시위군중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일제의 무력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5. 29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27·62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시은 - 제주도 신좌(新左) 신좌면 시위
본문
1887년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농산(聾山)이다. 1919년 당시 조천리에 거주하며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1919년 3월 16일 서울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4학년생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하였다. 김장환으로부터 서울의 만세 소식을 들은 김시범(金時範)의 권유로 제주도에서도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7일 김시범, 김장환과 함께 조천리 미밋동산(味毛峙)에서 거사하기로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3월 19일까지 14명을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범의 형으로 제주도에서 명망이 높은 유학자였던 김시우(金時宇)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 신촌리(新村里)와 함덕리(咸德里) 등 인근 마을과도 연락하여 사람들을 시위에 동참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3월 21일 오전 10시경 주도자 및 인근 주민과 서당 학생 등 150여 명과 함께 미밋동산으로 나갔다. 오후 3시 무렵 미밋동산에서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500~600명의 시위 대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제주성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신촌리에서 조천주재소 및 제주경찰서에서 출동한 30여 명의 일제 경찰과 대치하였고, 이 과정에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8일 출옥하였다. 1920년 8월 김진호(金振鎬)·원응조(元膺祚)·김희주(金熙冑) 등과 함께 조천단연동맹회(朝天斷煙同盟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1년에는 1919년 만세 시위로 투옥되었던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미모치(味毛峙,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의미로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으며, 옥고로 인해 사망한 동지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923년 11월 8일 신좌면 조천리 유지들과 발기한 조천노동단(朝天勞働團)의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범 징역 1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1부 1919-05-2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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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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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4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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