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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93
성명
한자 金弼遠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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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21 제주(濟州) 신좌면(新左面)에서 김장환(金章煥), 김시범(金時範)등 13명과 함께 "미밑동산"에 들어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백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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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21일 제주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제주의 만세운동은 조천에서 시작되었는데, 조천의 만세시위는 기독교 인사들과 유림이 연합하여 일어났다. 이러한 조천의 만세운동계획은 서울 휘문학교에 유학하고 있던 김장환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3월 15일 귀향하여 서울에서의 만세소식을 알리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김장환의 백부이며 제주도 내에서 명망이 높던 김장환(金章煥)은 뜻을 같이 하는 김시범(金時範) 등 동지 13명과 함께 조천리에서 조금 떨어진 '미밑동산'에 들어가 결의를 다짐하면서 거사일을 3월 21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는데, 김필원은 이 때 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조천 뿐 아니라 이웃의 신촌(新村)·함덕(咸德) 등지에도 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면서 서당 생도와 함께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동원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21일 김필원 등은 거사장소인 만세동산으로 나아가 6백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조천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져 다음날인 22일과 장날인 24일까지 일어났으며, 이어 도내 각처로 뻗어 나갔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5. 29 대구복심법원)
  • 범죄인명부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제주도지(제주도) 상권 3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626·6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64∼1274면
  • 3·1운동실록(이용락) 561∼56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필원 - 제주 제주 신좌면 시위
본문
1900년 9월 16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조천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제주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제주도에서는 조천리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조천리 유지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은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가 발발하고 있음을 듣고, 제주도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3월 16일 서울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시범의 조카 김장환(金章煥)이 만세시위에 참가해 활동하다가 체포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조천리로 돌아왔는데, 이때 서울에서의 시위 상황을 전해 들었다. 이튿날인 3월 17일 김시범과 김시은, 김장환은 조천리 미밋동산[(味毛峙)]에서 거사하기로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동지 규합 과정에서 김용찬(金容燦)·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황진식(黃鎭式)·김경희(金慶熙) 등과 함께 시위 계획에 찬성하고 동참하였다. 또 이들과 함께 시위 날짜를 최익현(崔益鉉)의 제주 지역 제자인 김희정(金羲正)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제주도 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유학자이자 김시범의 큰형이었던 김시우(金時宇)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1919년 3월 21일 오전 10시경 김시범·김시은 등 주도자 및 인근 주민과 서당 학생 등 150여 명과 함께 미밋동산으로 나갔다. 더 많은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창호지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라 써서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제주경찰서 조천주재소 서쪽에서 시위대가 모여 있는 동쪽 미밋동산으로 행진하였다. 행진 중에 약 500여 명의 주민이 그를 따라 미밋동산에 이르렀다. 오후 3시 무렵 미밋동산에서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5~6백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국기를 흔들며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행진 도중이던 신촌리에 조천주재소와 제주경찰서에서 진압하러 온 30여 명의 일제 경찰이 출동하였으며 김시범·김시은·김용찬·고재륜 등 시위 주도자들이 끌려갔다.이때 단속을 피하고, 다시 이튿날인 3월 22일 조천 장터에서 백응선(白膺善)·박두규(朴斗圭)와 함께 2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전날 연행된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신촌리를 향하여 행진하던 도중에 박두규와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이후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풀려난 후 1921년에는 투옥된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항일운동의 뜻을 버리지 않기 위해 미모치(味毛峙)(미밋동산)의 동지라는 의미로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감옥에서 노동으로 받은 새끼를 꼬아 받은 약간의 노역비 등을 모아 옥고로 인해 1920년 3월 26일 사망한 백응선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웠다.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제주도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범 징역 8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2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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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4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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