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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7월 3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5년여 간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음덕면(陰德面) 남양리(南陽里, 현 화성시 남양읍) 소재 사립보통학교 보습과를 졸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1년 8월부터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측지과(測地課)에서 1916년까지 기사로 재직하였다. 1917년 7월 송산면 서기로 발령받아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송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1919년 3월 26일 송산면 사강리 구장 홍명선(洪明善)의 집에 호세(戶稅)를 납부하기 위해 12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때 홍효선(洪孝善)이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하니 우리 마을에서도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같은 날 오후 5시경 홍면옥(洪冕玉, 이명 홍면(洪冕))·홍효선·이규선(李奎善) 등이 이들을 이끌고 사강리 소재 송산면사무소 앞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세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마을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이때 송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 군중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약 150명의 시위대는 송산면사무소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저녁 11시까지 송산면과 서신면(西新面)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이틀 뒤인 3월 28일 오전 11시경 마을 주민들이 재차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다시 이에 동조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오후 2시 1,000명이 넘는 시위대가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인근에 모여 태극기 2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날은 사강시장 장날로 수원면· 음덕면·마도면(麻道面)·송산면·서신면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다.이 시위를 진압하고자 수원경찰서에서 순사부장과 남양주재소 소속 순사가 현장에 출동하였다. 시위대는 이들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더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오후 3시경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은 시위가 진정되지 않자 급기야 주도자 홍면옥·홍효선·예종구(芮鍾九)를 체포하여 무릎을 꿇게 하였다. 그리고 순사보로 하여금 이들을 지키게 하고 동시에 권총으로 군중들을 위협하며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이때 홍면옥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순사보의 멱살을 잡고 저항하였으며, 이를 제재하려는 순사부장에게도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자 순사부장이 권총을 발사하였고, 총알이 홍면옥의 어깨 부위를 관통하였다. 총소리가 나자 시위가 잠시 주춤해졌고, 이 소리를 듣고 홍면옥의 동생인 홍준옥(洪㻐玉)이 달려왔다. 홍준옥이 총상으로 쓰러져 있는 형 홍면옥을 보고, “형이 총에 맞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 총을 쏜 순사를 잡아 죽여달라”며 절규하였다. 또한 쓰러져 있던 홍면옥 역시 순사를 죽여 달라고 부르짖었다.이후 홍준옥은 홍면옥을 면사무소로 옮겨 응급조치를 하며, 다시 총을 쏜 일본인 순사를 죽여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동료 면서기였던 홍준옥의 절규에 격분해, “사람을 죽인 순사를 처단하자”며 뛰쳐나가 군중을 이끌었다. 뒤이어 왕광연(王光演)도 순사를 처단하자고 외치며 시위대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군중들의 시위는 더욱 격앙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신변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순사부장은 자전거를 타고 남양주재소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홍준옥, 왕광연과 함께 마을 주민 20여 명을 이끌고 순사들을 추격하였다. 사강리 시장에서 남양으로 향하는 길 동쪽 끝 사강경찰관주재소 인근에서 누군가가 노구치가 타고 있던 자전거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러자 왕광연과 함께 달려들어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순사부장을 구타하였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합세하여 순사부장을 처단하였다.이 일로 1919년 3월 29일 홍면옥·홍준옥·왕광연 등과 함께 붙잡혀 가혹한 조사에 시달렸다. 조사 과정에서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극심한 고문을 당하여 몇 차례 정신을 잃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고문 상처로 수원 자혜병원(慈惠病院)에서 2주 이상의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 등으로 징역 1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12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7년 12월 23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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