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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월 2일(음력)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주내면(州內面, 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坡州里)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호는 남파(南坡)이고, 중국에서 활동할 때 복정일(濮精一) ・ 복순(濮純)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반남 박씨의 시조인 박응주(朴應珠)의 26대 손으로, 북학파의 거두인 박지원(朴趾源)은 7대조이고 6대조 박종악(朴宗岳)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5대조 박만수(朴晩壽)는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1901년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입학하였다. 철도공사 노역에 동원되었을 때, 일인 교사에게 반항하다가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인근 청송 심씨 탄실과 결혼하였다. 1904년 상공학교 동기생인 박호원(朴浩元)의 추천으로 보안회(保安會)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개척요구안 반대투쟁에 참여하였고, 을사늑약 후 민영환이 자결하자 아버지와 함께 문상하였다.
1908년 상공학교의 후신인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 염직과에 입학하였다. 공업 연구와 발전에 선두 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학생들과 함께 공업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신규식(申圭植), 김택영(金澤榮), 양기탁(梁起鐸) 등 유지 인사들이 이들의 취지에 공감하고 찬성원이 되어 후원해 주었다. 이때부터 신규식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업계』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활동하였고 1910년 졸업하였다.
관립공업전습소에 다니면서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1909년 8월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가 조직되고 각 지역에 연회가 결성될 때, 한성연회에 참여하여 옥관빈, 윤기섭 등과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공업연구회의 찬성원인 신규식, 조완구, 이시영 등이 대종교에 참여함에, 공업전습소 학우들로 하여금 대종교를 신봉토록 하였다. 이후 지교(知敎) ・ 상교(尙敎) 등의 간부직을 맡으며 대종교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11년 2월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룽징(龍井)에 기거하면서 통사(通辭, 통역)들 중 중국어를 모르는 이주민들에게 토지 등을 알선해주면서 부인이나 딸을 겁탈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중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중국 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하며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어는 훗날 그의 활동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간민교육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일제측 자료에는 평의원과 부회장으로 나타나 있다. 간민교육회는 1913년 4월 간민회로 발전하여 한인 자치단체로 역할하였다.
1912년 청파호에 청일학교(靑一學校)를 세우고, 한인자제를 교육하며 대종교 세력을 확장하는 데도 앞장섰다. 1914년 중국 당국에서 대종교 활동에 압박을 가해오자, 성장(省長) 겸 독군(督軍) 장쭤샹(張作相)을 만나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설득하였다.
1915년 이시영(李始榮)의 연락을 받고 서간도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중국 관헌의 경계를 풀고 한인들의 농토 구입 시 어려움 등을 해결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자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의 권유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7년 신규식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동제사에 호응할 조직을 건설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벌였다. 일경의 추격을 받게 되자 북간도를 거쳐 지린(吉林)으로 갔다.
1919년 지린에서 정원택이 갖고 온 신규식의 서신을 받았다. 내용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 중인데 지린에서도 이에 호응하라는 것이었다. 여준, 조소앙, 김좌진 등과 협의하여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총무 겸 외무를 맡아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선언서의 기초는 조소앙이 맡았다. 1919년 2월 김교헌, 김동삼, 이승만, 이상룡 등과 국내외 각지 대표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 ・ 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조소앙을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 파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토록 하였다. 4월 23일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에서 박은식, 신채호 등과 평정관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로 이름을 바꾸고 통령(統領)을 맡았다. 1919년 12월 여준과 함께 연해주 니콜리스크에 가서 무기를 구입해 왔고 최동규, 계영화 등과 일제 요인 처단을 목적으로 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21년 4월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7월에는 외무부 외사국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외무차장 대리도 맡았다. 외사국장으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간사를 맡아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대표를 참석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을 전권특사로 광둥(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할 때, 부사로 임명되었고 수행원 민필호와 함께 신규식을 수행하여 광저우(廣州)로 갔다. 신규식은 호법정부 대총통인 쑨원(孫文)을 접견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얻었다. 1922년 2월 광둥주재 임시정부 대표로 임명되어 호법정부와의 외교업무를 담당하였다. 5월 천지옹밍(陳炯明)의 반란으로 호법정부가 붕괴되자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2년 9월 신규식이 세상을 떠나자, 상하이를 떠나 만주와 베이징(北京)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펑텐(奉天)에서 중국 요인들과 회견하고 1924년 12월 베이징에서 중국국민당 인사 쉬첸(徐謙) 등을 상대로 중국에 이주한 한인들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조소앙과 함께 차정신(車廷信), 이빈(李彬), 정성철(鄭聖哲), 유철산(劉鐵山) 등을 천궈푸(陳果夫)에게 소개하여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만주로 가서 1925년 1월 무링현(穆陵縣)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에 참여하였고, 3월 김좌진(金佐鎭), 김혁(金爀), 정신(鄭信) 등과 닝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광제(李光濟), 임득산(林得山) 등과 남경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난징(南京)에서 천궈푸의 도움을 받아 중국국민당 국제부 선전과에서 일하였다.
1930년 11월 난징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하여 「동삼성 한교 문제(東三省韓僑問題)」를 제출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 문제와 독립운동에 대해 협력을 요청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후 임시정부 요인 및 김구 등을 피난시켰다. 천궈푸와 교섭하여 자싱(嘉興)에 피신처를 마련하고 엄항섭, 안공근으로 하여금 이동녕, 이시영 등 요인들을 자싱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이어 미국인 목사 피치 박사집에 은거하고 있던 김구도 자싱에 있는 추푸청(褚補成)의 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1933년 8월 천궈푸와 교섭하여 김구와 장제스(蔣介石)의 회담을 추진하였고,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다. 이회담을 계기로 중국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게 되었다.
난징에서 활동하며 중국국민당과 자싱에 있는 김구의 연락을 맡았다. 주요 임무는 중국측의 지원 자금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김구의 핵심 측근으로서 위상을 확보하였다.
김구의 위임을 받아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군의 난징 이동을 주선하였다. 김구는 장제스와 면담 후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그 휘하에 있는 독립군들을 입교시키고자 하였다. 난징에 온 이규채, 신숙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의 중국 관내 이동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1933년 말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 등은 난징으로 이동하여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1934년 6월 자금 문제로 인한 오해로 김구와 결별하고 건강 악화로 홍콩 ・ 쑤저우(蘇州) 등지에서 요양하였다. 중일전쟁기 이동녕, 이시영 등의 주선으로 김구와 다시 손잡았다. 임시정부가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도착한 뒤에는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반이된 정당으로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였고 조소앙, 지청천, 조완구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지청천, 유동열, 김학규, 조경한, 이범석 등과 한국광복군 창설(1940년 9월 17일)의 실무를 맡았다. 주로 중국측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광복군 창설이 중국의 항일전에 유익하다는 논리로 광복군 창설에 대한 지원과 승인을 요청하였다.
1940년 10월 9일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바꾸었다. 김구가 주석에 선출되었고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차리석 등과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법무장을 맡았다.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예속하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통보해 왔는데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하에 두려는 것이었다. 재정적 문제 등으로 중국측의 지원이 필요했던 임시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3년 2월 조소앙, 김규식과 함께 교섭 대표로 선출되어 중국측을 상대로 9개준승 취소를 위한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44년 8월 23일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허잉친(何應欽)이 취소를 통보해 왔다. 이로써 광복군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44년 4월 22일 임시의정원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을 부주석에 선출하고 김원봉, 최석순을 군무부장과 문화부장으로 선임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이때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44년 9월 5일 김구 주석과 장제스 중국군사위원장의 면담을 주선하고 통역을 맡았다. 김구는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재정적 원조, 임시정부 사무실 마련 등 6개 사항을 요구하였다.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김구와 장제스의 면담에서도 통역을 맡았다.
1945년 11월 1일 주화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베이징에 화북한교선무단(단장 이광), 카이펑(開封)에 화중한교선무단(단장 이상만), 난징에 화남한교선무단(단장 지청천)을 설치하여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선편으로 한인들을 귀국시키는 업무를 총괄하였다.
1946년 2월 충칭(重慶)에서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5월 난징으로 천도한 중국 정부를 따라 주화대표단도 난징으로 이전하였다. 그해 가을 주화대표단의 업무를 민석린(閔石麟)에게 맡기고 펑텐(奉天, 지금의 瀋陽)으로 가서 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에 대한 보호 활동과 이들의 귀국을 주선하였다.
1948년 4월 16일 귀국하였다. 남북 협상에 참여하려는 김구를 만류하라는 장제스 부탁으로 귀국하였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대종교의 교적 간행을 위해 기부하는 등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3월 9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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