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04
성명
한자 朴贊翊
이명 朴南坡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9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4년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재학시 독립운동모의로 퇴학 당하고 1906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이시영(李始榮)등의 조직체 신민회(組織體新民會)에 가입하다.
2. 1910년 합병이 되자 북만주(北滿洲)로 망명하다.
3. 북간도(北間島)에서 이상설(李相卨), 나철(羅喆), 백순(白純) 등의 지도로 대종교(大倧敎)에 투신하여 교육에 주력하였고 1912년에는 화능현(和能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다.
4. 1912년 2월 상해(上海)신규식선생(申圭植先生)의 지령으로 서북간도(西北間島)노령(露領)의 동지와 연락하여 동월 27일에는 길림(吉林)에서 조소앙(趙素昻), 여시형(呂時亨), 김좌진(金佐鎭)등 39인명의로 대한독립의용군(大韓獨立義勇軍)을 조직하다.
5. 1917년 북경(北京)에 와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신규식(申圭植)등 선배와 활동하고 상해(上海)에서 동제사(同濟社) 창립하다.
6. 군자금조달차 국내에 잡입하였다.
7.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들어가 1921년 7월 7일에는 외무부외사국장 겸 외무차장대리(外務部外事局長兼外務次長代理)를 하다.(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p. 142)
8. 1922년 신규식선생(申圭植先生) 서거로 동제사(同濟社) 이사장(理事長)이 되다.
9. 윤봉길(尹奉吉)상해공원 사건(上海公園事件)이 발생하자 김구 선생(金九先生)의 도피를 방조하다.
10. 1933년 5월 김구(金九)와 같이 남경중앙군관학교 구내(南京中央軍官學校構內)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낙양군관학교내(洛陽軍官學校內)한국 독립군 양성(韓國獨立軍養成)을 위하여 특별반(特別班)을 설치하고 군간부를 양성하도록 하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348)
11. 1940년 9월 임시정부(臨時政府)중경(重慶)으로 이전시키고 10월에 국무위원(國務委員)이 되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353, 375, 377)
12. 1945년 임정주화단(臨政駐華團) 단장(團長)으로 활동하다.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04년 관립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차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 초에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활동하였다.

그 뒤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 당하자 동지 박승익(朴勝益) 등 10여 명과 같이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 그해 겨울 만주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독립투쟁가 이상설(李相卨) 백 순(白純)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일방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나 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 교인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학교를 설치하고 애국과 자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正敎)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성의를 보였다. 어느 것이나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상해로 건너 가 손 문(孫文)을 따라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여 만청(滿淸)정부를 타도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1912년 7월에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박은식(朴殷植)을 총재로 추대하였으며,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이 광(李光)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吉林)에서 김교헌(金敎獻) 김동삼(金東三) 조소앙(趙素昻) 이동녕(李東寧) 등 39인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도 39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孫貞道) 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손 문(孫文)이 광동(廣東)에 중국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외교총장 신규식(申圭植)을 수행하여 임시정부를 승인 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3년 4월에는 외사국장으로서 봉천에 특파되어 재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중국정부 관리와 외교 접촉을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대중(對中)외교를 계속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국국민당 조직에 참여하고, 동년 12월에는 대한독립당 대표로 남경(南京)정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931년 5월에는 남경의 국민당 전당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안호상(安浩相)과 함께 참석하여 만주 동삼성(東三省)의 독립운동 문제를 거론하였으나 일군의 만주 침략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년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등 부단한 활동을 벌여 옥관빈(玉觀彬)과 상해 한인(韓人)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유인발(柳寅發) 등을 저격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 남경지부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간부 양성과정을 설치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신익희(申翼熙) 김성숙(金星淑) 김원봉(金元鳳)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 중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년 5월에는 김 구(金九) 홍 진(洪震) 유동열(柳東說) 조소앙(趙素昻)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8 15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49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37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45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8 353 354 371·373·375·377면
  • 고등경찰요사 120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2·78·9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20·143·165·438·480·494·499 502 602·644·664·689·698·737·897·969·970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1·142·151·154·15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99·107·117면
  • 일제침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찬익 - 경기 파주(坡州) -
본문
1884년 1월 2일(음력)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주내면(州內面, 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坡州里)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호는 남파(南坡)이고, 중국에서 활동할 때 복정일(濮精一) ・ 복순(濮純)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반남 박씨의 시조인 박응주(朴應珠)의 26대 손으로, 북학파의 거두인 박지원(朴趾源)은 7대조이고 6대조 박종악(朴宗岳)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5대조 박만수(朴晩壽)는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1901년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입학하였다. 철도공사 노역에 동원되었을 때, 일인 교사에게 반항하다가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인근 청송 심씨 탄실과 결혼하였다. 1904년 상공학교 동기생인 박호원(朴浩元)의 추천으로 보안회(保安會)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개척요구안 반대투쟁에 참여하였고, 을사늑약 후 민영환이 자결하자 아버지와 함께 문상하였다. 1908년 상공학교의 후신인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 염직과에 입학하였다. 공업 연구와 발전에 선두 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학생들과 함께 공업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신규식(申圭植), 김택영(金澤榮), 양기탁(梁起鐸) 등 유지 인사들이 이들의 취지에 공감하고 찬성원이 되어 후원해 주었다. 이때부터 신규식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업계』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활동하였고 1910년 졸업하였다. 관립공업전습소에 다니면서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1909년 8월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가 조직되고 각 지역에 연회가 결성될 때, 한성연회에 참여하여 옥관빈, 윤기섭 등과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공업연구회의 찬성원인 신규식, 조완구, 이시영 등이 대종교에 참여함에, 공업전습소 학우들로 하여금 대종교를 신봉토록 하였다. 이후 지교(知敎) ・ 상교(尙敎) 등의 간부직을 맡으며 대종교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11년 2월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룽징(龍井)에 기거하면서 통사(通辭, 통역)들 중 중국어를 모르는 이주민들에게 토지 등을 알선해주면서 부인이나 딸을 겁탈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중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중국 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하며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어는 훗날 그의 활동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간민교육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일제측 자료에는 평의원과 부회장으로 나타나 있다. 간민교육회는 1913년 4월 간민회로 발전하여 한인 자치단체로 역할하였다. 1912년 청파호에 청일학교(靑一學校)를 세우고, 한인자제를 교육하며 대종교 세력을 확장하는 데도 앞장섰다. 1914년 중국 당국에서 대종교 활동에 압박을 가해오자, 성장(省長) 겸 독군(督軍) 장쭤샹(張作相)을 만나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설득하였다. 1915년 이시영(李始榮)의 연락을 받고 서간도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중국 관헌의 경계를 풀고 한인들의 농토 구입 시 어려움 등을 해결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자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의 권유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7년 신규식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동제사에 호응할 조직을 건설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벌였다. 일경의 추격을 받게 되자 북간도를 거쳐 지린(吉林)으로 갔다. 1919년 지린에서 정원택이 갖고 온 신규식의 서신을 받았다. 내용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 중인데 지린에서도 이에 호응하라는 것이었다. 여준, 조소앙, 김좌진 등과 협의하여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총무 겸 외무를 맡아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선언서의 기초는 조소앙이 맡았다. 1919년 2월 김교헌, 김동삼, 이승만, 이상룡 등과 국내외 각지 대표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 ・ 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조소앙을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 파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토록 하였다. 4월 23일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에서 박은식, 신채호 등과 평정관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로 이름을 바꾸고 통령(統領)을 맡았다. 1919년 12월 여준과 함께 연해주 니콜리스크에 가서 무기를 구입해 왔고 최동규, 계영화 등과 일제 요인 처단을 목적으로 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21년 4월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7월에는 외무부 외사국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외무차장 대리도 맡았다. 외사국장으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간사를 맡아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대표를 참석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을 전권특사로 광둥(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할 때, 부사로 임명되었고 수행원 민필호와 함께 신규식을 수행하여 광저우(廣州)로 갔다. 신규식은 호법정부 대총통인 쑨원(孫文)을 접견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얻었다. 1922년 2월 광둥주재 임시정부 대표로 임명되어 호법정부와의 외교업무를 담당하였다. 5월 천지옹밍(陳炯明)의 반란으로 호법정부가 붕괴되자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2년 9월 신규식이 세상을 떠나자, 상하이를 떠나 만주와 베이징(北京)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펑텐(奉天)에서 중국 요인들과 회견하고 1924년 12월 베이징에서 중국국민당 인사 쉬첸(徐謙) 등을 상대로 중국에 이주한 한인들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조소앙과 함께 차정신(車廷信), 이빈(李彬), 정성철(鄭聖哲), 유철산(劉鐵山) 등을 천궈푸(陳果夫)에게 소개하여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만주로 가서 1925년 1월 무링현(穆陵縣)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에 참여하였고, 3월 김좌진(金佐鎭), 김혁(金爀), 정신(鄭信) 등과 닝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광제(李光濟), 임득산(林得山) 등과 남경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난징(南京)에서 천궈푸의 도움을 받아 중국국민당 국제부 선전과에서 일하였다. 1930년 11월 난징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하여 「동삼성 한교 문제(東三省韓僑問題)」를 제출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 문제와 독립운동에 대해 협력을 요청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후 임시정부 요인 및 김구 등을 피난시켰다. 천궈푸와 교섭하여 자싱(嘉興)에 피신처를 마련하고 엄항섭, 안공근으로 하여금 이동녕, 이시영 등 요인들을 자싱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이어 미국인 목사 피치 박사집에 은거하고 있던 김구도 자싱에 있는 추푸청(褚補成)의 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1933년 8월 천궈푸와 교섭하여 김구와 장제스(蔣介石)의 회담을 추진하였고,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다. 이회담을 계기로 중국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게 되었다. 난징에서 활동하며 중국국민당과 자싱에 있는 김구의 연락을 맡았다. 주요 임무는 중국측의 지원 자금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김구의 핵심 측근으로서 위상을 확보하였다. 김구의 위임을 받아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군의 난징 이동을 주선하였다. 김구는 장제스와 면담 후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그 휘하에 있는 독립군들을 입교시키고자 하였다. 난징에 온 이규채, 신숙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의 중국 관내 이동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1933년 말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 등은 난징으로 이동하여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1934년 6월 자금 문제로 인한 오해로 김구와 결별하고 건강 악화로 홍콩 ・ 쑤저우(蘇州) 등지에서 요양하였다. 중일전쟁기 이동녕, 이시영 등의 주선으로 김구와 다시 손잡았다. 임시정부가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도착한 뒤에는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반이된 정당으로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였고 조소앙, 지청천, 조완구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지청천, 유동열, 김학규, 조경한, 이범석 등과 한국광복군 창설(1940년 9월 17일)의 실무를 맡았다. 주로 중국측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광복군 창설이 중국의 항일전에 유익하다는 논리로 광복군 창설에 대한 지원과 승인을 요청하였다. 1940년 10월 9일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바꾸었다. 김구가 주석에 선출되었고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차리석 등과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법무장을 맡았다.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예속하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통보해 왔는데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하에 두려는 것이었다. 재정적 문제 등으로 중국측의 지원이 필요했던 임시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3년 2월 조소앙, 김규식과 함께 교섭 대표로 선출되어 중국측을 상대로 9개준승 취소를 위한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44년 8월 23일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허잉친(何應欽)이 취소를 통보해 왔다. 이로써 광복군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44년 4월 22일 임시의정원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을 부주석에 선출하고 김원봉, 최석순을 군무부장과 문화부장으로 선임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이때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44년 9월 5일 김구 주석과 장제스 중국군사위원장의 면담을 주선하고 통역을 맡았다. 김구는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재정적 원조, 임시정부 사무실 마련 등 6개 사항을 요구하였다.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김구와 장제스의 면담에서도 통역을 맡았다. 1945년 11월 1일 주화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베이징에 화북한교선무단(단장 이광), 카이펑(開封)에 화중한교선무단(단장 이상만), 난징에 화남한교선무단(단장 지청천)을 설치하여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선편으로 한인들을 귀국시키는 업무를 총괄하였다. 1946년 2월 충칭(重慶)에서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5월 난징으로 천도한 중국 정부를 따라 주화대표단도 난징으로 이전하였다. 그해 가을 주화대표단의 업무를 민석린(閔石麟)에게 맡기고 펑텐(奉天, 지금의 瀋陽)으로 가서 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에 대한 보호 활동과 이들의 귀국을 주선하였다. 1948년 4월 16일 귀국하였다. 남북 협상에 참여하려는 김구를 만류하라는 장제스 부탁으로 귀국하였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대종교의 교적 간행을 위해 기부하는 등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3월 9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박찬익(관리번호:2504)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